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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관일 Dec 02. 2022

우리는 왜
대화를 못하고 대결을 할까?

"그냥 싸우기만 한다"

우리는 왜 대화를 못하고 대결을 할까? 

     

“우리가 얼마나 대화를 못 해요? 그냥 싸우기만 하잖아요. 그 이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중략) 어떤 이슈가 생기면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의견이나 진영논리에 편승하는 게 전부예요.”

《심연》의 작가이며 종교학자인 배철현 교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인터파크도서 북DB, 북&인터뷰, 2016. 8. 10).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대화풍경이 선명히 그려집니다. 요즘은 부모 자식 간에도 대화가 잘 안 됩니다.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자기주장을 펴기에 바쁩니다. 특히 정치 냄새가 나는 이야기일 때는 더욱 심합니다. 대화가 아니라 게거품을 물며 악다구니를 씁니다. 상식적 논리가 아니라 진영논리에 올라타 억지를 부립니다. 결국 목소리가 커지고 자칫하면 싸움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머쓱하게 마무리되거나 심하면 등을 돌려 인간관계에 파국을 맞습니다. 


직장에서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상사와 부하가 “대화를 하자”며 자리를 함께 해도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 지시나 강압적 명령으로 일관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부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좋든 싫든 상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척은 하지만 입안에서는 ‘이제 그만해!’ ‘역시 꼰대!’, 이렇게 중얼거리기 십상입니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대립이요 단절입니다. 그러니 대화를 하면 할수록 통하지 못하고 막힙니다. 벽이 두꺼워지고 높아집니다. 직장에서 ‘소통’을 그렇게 많이 부르짖고 교육이 많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대화가 안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나의 대화지능은 어떤 수준일까?


우리는 왜 대화가 제대로 안될까요? 대화에 미숙할까요? 대화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배우기는 했는데 대화를 배운 게 하니라 대결을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태어나 성장하면서 대화를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타인과 얼마나 잘 통할 것인지를 배우기보다, 어떻게 자기주장을 잘 펼 것인지를 배웁니다. 


말로서라도 남에게 지지 않는, 거꾸로 말하면 이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말을 배웁니다. 열정적인 부모를 만나면 어린 나이에 웅변학원까지 다니게 됩니다. 세상살이에서 뭘 그렇게 ‘웅변’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죠. 인간은 본능적으로 대화보다는 자기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가 의견을 상대에게 주입시키려 애씁니다.  


‘대화지능’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주창한 미국의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주디스 E. 글레이저(Judith E. Glaser)는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중독에 빠져있어서 대화를 하면서도 이기려고 하고, 그러기에 자기의 생각을 상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편도체라는 원초적 두뇌가 작동하여 뇌가 닫혀버리고 소통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대화의 상대가 지위가 더 높으면 ‘말하기(tell)-설득하기(sell)-고함치기(yell)’신드롬에 빠지게 됩니다(주디스 E. 글레이저, 《대화지능(Conversational Intelligence)》, 김현수 옮김, 청림출판 , 2014). 


이런 걸 보면 우리나 외국이나 모두 같은 것 같지만 우리가 좀 더 편향적이고 심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화끈한 성격의 다혈질 민족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어렸을 때의 가정교육부터 원인을 따질 수 있고 정치 때문이라고 이유를 댈 수도 있겠습니다.      


대화는 ‘관계’의 기본입니다. 원활한 인간관계는 원활한 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의 한자표기를 잘 보세요.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동물입니다. 그럼으로 대화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은 관계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요,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안 돼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직장생활이든 가정생활이든, 세상살이를 제대로 영위하려면 가장 먼저 ‘대화’를 배워야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듣기를 가르쳐야 하며 웅변을 가르치기보다 잘 응대하기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건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통이란 대화능력입니다. ‘품격 있게 통하는 말하기’입니다. 그것이 대화다운 대화,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대화는 어떤지 진지하게 점검해보세요. 오십쯤의 나이가 됐는데 아직도 대화보다 대결에 익숙하다면, 그리고 내편 네편에 따라 핏대를 올릴 정도라면 대화법을 넘어 세상을 잘못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화도 제대로 못하면서 과연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볼만한 때입니다(나의 책 <오십의 말품격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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