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비가 오지 않는 주말이라 집 뒤편 산책로를 걸었다. 제법 도심 숲의 모습을 갖춘 곳이라 날이 좋을 때면 운동 삼아 종종 거닐곤 한다. 봄이 오면 긴 겨울을 이겨낸 가지각색의 봄꽃이 길 양편으로 화사한 얼굴을 내밀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어디선가 날아온 샛노란 금계국이 군집을 이루어 흐드러지게 핀다. 지난여름 나풀나풀 날아서 내 앞을 지나갔던 그 씨앗이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땅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면 분홍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 등 다양한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바람에 흔들린다. 올해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일교차가 지나치게 컸던 탓인지 예년만큼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가을이 무르익었지만 연일 내리는 비가 심상치 않다. 점점 이상해지는 날씨에 심란한 마음으로 걷다 산책로 중간에 이르니,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어릴 때 보았던 깊고 짙은 녹색이 아니라 열대의 바다와 점점 닮아가는 영롱한 빛깔에 다시 마음이 심란해졌다. 바다와 짧은 조우를 끝내고 발걸음을 옮기자 물기를 머금은 초록의 싱그러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가슴 깊숙이 전해지는 숲의 향기를 들이키고 늘 같은 자리에 고요히 서 있는 나무들을 눈에 담았다.
처음 눈에 띈 나무는 쌈 싸 먹어도 될 만큼 넓고 커다란 잎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앙증맞은 도토리도 매달려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바닥에도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어르신들이 까만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담던 게 도토리였던 모양이다. ‘다람쥐가 굶어요, 그거 불법이에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남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남편의 말대로 다람쥐의 생존권만큼 어르신의 작은 즐거움도 중요한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나무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걷던 중, 좀 전과는 다른 나무를 발견했는데 잎의 모양새가 확연하게 달랐다. 반으로 접으면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듯한 익숙한 모양이었는데, 이 나무에도 도토리가 매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나무는 잎 모양은 비슷했으나, 도토리의 모양새부터 감싸고 있는 껍질까지 생김새가 모두 달랐다. 그때 불현듯 아이가 어렸을 때 함께 부르던 ‘도토리의 꿈’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아름다운 숲속에 작고 예쁜 도토리 풀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바람에 실려 오는 산새노래에 멋진 참나무 되는 꿈을 꾼다네.’
아, 도토리는 참나무의 열매였구나. 그러고 보니 참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참나무가 특정 나무의 이름이 아니라 참나무속에 속하는 식물 약 500 여종을 일컫는 말이라는 건 집에 돌아와 검색해 보고서야 알았다. 추측하건대 내가 숲에서 보았던 도토리나무는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 졸참나무였을 것이다. 자주 오르던 숲이었지만 그 숲에 있는 나무가 무엇인지, 어떤 잎 모양을 가졌는지, 기둥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어떤 열매를 맺고 어떤 생을 이어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다양한 모양으로 각자의 생을 이어가는 중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보고 살았나? 뜬눈으로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조용히 골몰하는 사이 산책로의 끝에 다다랐다. 숲의 시작은 인위적으로 만든 나무 계단이었는데, 그 끝은 지면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얽히고설켜 만든 자연의 계단이었다. 뿌리에 발이 닿는 순간 낯설고 위압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이곳에 있었겠구나! 그 자리에서 거센 풍파를 이겨냈구나!
숲에 다녀온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매일 간헐적으로 뿌려대는 빗방울에 선뜻 나서기가 힘들었다. 내일 일기예보를 보니 흐리긴 해도 비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 아침 산책에 나서야겠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야겠다. 밑동부터 우듬지까지 찬찬히 눈에 담아야겠다. 늘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살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