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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yunion Sep 25. 2022

매몰비용 vs 기회비용

사측은 매몰 비용이라 언급했지만 우리는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했던 단체교섭이 어제로 끝이 났다. 단체교섭 중에 ‘지겹다’. ‘지쳤다’는 이야기가 절로 나올 만큼 9개월이나 소요된 우리의 첫 단체교섭은 매우 힘들었다. 지난해 10월 노조가 만들어졌지만, 사측은 연말 행사와 연초 사업계획을 핑계로 교섭을 올해 1월로 미뤘고, 어렵게 시작된 교섭은 6차 교섭 만에 사측의 분노로 중단됐다.


지금 생각해봐도 황당한 이유였는데, △회의록과 교섭에 필요한 자료를 약속한 시각에 교환하고 △전향적인 태도로 성실히 교섭에 임해 달라는 내용의 노조 성명에 사측 교섭위원이 ‘화가 났다’는 것이다. 자료 공유가 늦긴 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고 성명을 발표하면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실추돼 창피하다나??      

사측의 이해하기 어려운 억지와 사과 요구로 우리 교섭은 4월에 중단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 조정절차에 들어갔었어야 했다) 사측은 차기 교섭에 대한 고려 없이 분노만 앞세워 4인의 교섭위원이 일괄 사퇴했고, 이후 교섭위원 선정이 어렵다며 교섭을 미뤘다.      


교섭은 노조가 여러 번 교섭 재개를 촉구한 끝에 6월에 재개됐는데, 교섭위원 일괄 사퇴를 외쳤던 사측은 1기 교섭위원 중 1인을 포함한 2인의 교섭위원을 구성해왔다. 일괄 사퇴의 뜻도 모르고, 노사교섭의 중대함도 모르는 염치없는 행동이었다.     



동일임금 동일노동, 상시지속 업무의 비정규직 금지.. 이게 싫다고?

재개된 교섭에선 그래도 많은 것들이 타결됐다. 노조는 단체협약안 마련을 위해 많은 것들을 양보했고, 9개의 쟁점이 최종적으로 남았다.


노조는 13차 교섭에서 9개 쟁점 중 4개를 사측이 수용한다면 5개 쟁점을 양보하고, 심지어 2020년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들고 나온 사측의 임금협상안까지 수용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사측은 마지막 남은 쟁점 사안 9개 중 단 2개밖에 양보하지 못하겠다며 결렬을 선언했고, 우리는 이제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기로 했다.      




마지막 교섭에서 사측은 9개월간 노사교섭에 들어간 시간이 아깝다며 ‘매몰 비용’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매몰 비용은 ‘이미 발생해서 회수할 수 없는 비용’으로 선택의 번복 여부와 무관하게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이다)

성공 가능성이 없어도 투자하게 되는 매몰비용의 함정. 출처=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 경제편


사측은 우리 단체의 첫 노사교섭이며 그동안 들어간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 타결될 때까지 협상을 지속하길 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서로 더 이상 양보할 자리가 없어 공전하고 있는 교섭에서 매몰 비용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탈출구는 없다. 교섭이 진행될수록 쟁점 조항에 대해 노사 모두 도돌이표 같은 주장을 반복하며 감정만 상하고 있었다.


물론 노조도 타결을 원했고, 매몰 비용을 고려했기에 9개월을 협상했다. 단체교섭안을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조항을 적어내려간 노조의 노력을 생각해 본다면, 정리된 단체협상안에 빨간펜 들고 수정하기 시작한 사측과는 비교할 수 없게 노조의 매몰 비용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매몰 비용의 아쉬움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끝이 안 보이는 블랙홀에 쏟을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고, 더 이상의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9개월을 기회비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기회비용은 선택된 하나의 비용을 포기한 다른 선택에 대한 가치로 ‘선택의 비용’이다)

하나의 선택으로 포기하게 되는 다른 가치. 출처=상식으로 보는 세상의 법칙 : 경제편


그동안의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 지지부진한 협상 타결에 매달리느니 조정을 통해 쟁점 사안에 대한 외부의 판단을 받고, 빠르게 교섭을 끝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지방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해 우리의 교섭 과정과 쟁점 사안을 설명하는 과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사측과의 합의보다는 조정 절차를 밟아가는 과정이 더 나은 선택이기에 주저할 수 없었다.      



조정절차에 들어가는 책임은 사측에 있다


사측은 마지막 교섭에서 노조에 “시민단체가 노사교섭에서 합의하지 못하고 조정절차에 들어가게 된 것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고, 우리 단체의 내부 사정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에 대해 노조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런 말은 노조에 할 것이 아니라 사측이 스스로 되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외부에 알려질 우리 단체의 내부 사정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사측이 더 전향적으로 교섭에 임했으면 됐을 텐데 말이다. 단체교섭에서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기보단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을 선택하게 한 것은 사측이다.     


사측은 늘 잘못을 사과하기 전에 대외적인 평판을 신경 쓰며 노조의 행동을 철없는 행위로 치부하고 무시했다. 교섭에 성실히 임해 달라는 성명엔 화를 내며 교섭을 중단시켰고, 비정규직 고용을 규탄하는 성명에는 반성 대신 노조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사측의 잘못된 행위를 노조가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해도 사측은 늘 적반하장으로 노조에 화를 내며 책임을 떠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교섭까지 사측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하지만, 뒤로는 경시하는 사측의 태도는 위선적이다.  

    

진보적인 시민단체라는 우리 단체에 얼굴에 먹칠하는 것은 노조가 아닌 사측이란 것. 조정 절차를 통해서는 꼭 깨달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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