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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미 Apr 21. 2023

아이 캔 두잇이라는 마법 주문

믿어야지, 별 수 있나.

학교와 맞닿아 있는 곳에 산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중학교가 있었고, 그것보다 두 블럭 정도만 가면 초등학교가 있었으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침 헬스를 끝내고 집 가는 길에는, 그렇게 코 닿을 거리를, 매일 아침 데려다주는 초등학생들의 엄마 아빠와 자주 마주친다. 자신보다 손도 크고 키도 큰 어른의 손을 꼭 붙잡고 한 손에는 신발 가방을 들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과 그들을 데려다주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부모의 마음이란 저런 걸까 생각도 하며, 엄마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 엄마도 저렇게 나 학교 데려다줬어?"

"아니. 초등학교 입학 첫날에만 데려다주고, 그 후에는 베란다에서 지켜봤지."


그때를 떠올려보니 정말 그랬다. 우리 집은 그 아파트 단지 중에서도 제일 학교와 가까운 동이었고, 게다가 1층이었으니. 횡단보도에 서서 뒤들 돌아보면 베란다에서 손을 흔들던 엄마가 있었다. 엄마가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던 건 웬 유난일까 싶었던 마음일까,  독립심을 강하게 키우고자 했던 마음이었을까. 전자라면 나도 동의하니 별말 없고, 동의하는 걸 보니, 독립심 있게 자란 듯싶다.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유난을 떠는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유난이, 집을 나서기 전 현관문에서 치러졌다.

"I can do it"

"you can do it"

"we can do it!"


처음엔 내가, 그다음 문장은 엄마가, 마지막은 함께 외쳤던 영어. 내가 처음으로 배운 영어 문장이었다. 그 흔한 나이스 투 미츄보다 더 먼저 배웠던 영어.


"이게 무슨 뜻이야?"

"다 할 수 있다는 뜻이야. 우리 전부 다"


영어를 잘 몰랐던 어린 내게는, 그 말이 꼭 마법의 주문 같았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익스펙토 패트로늄 쯤 되려나.

뭐든지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같이, 든든한 주문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나는, 학교에서 앞에 나서야 하는 순간이 곧 맞서야 하는 순간이었다. 피하고 싶고, 숨고 싶고, '제발 나만 아니어라'라고 빌던 수많은 상황들. 구구단을 외우기 위해서 일어나야 하는 수업 시간이나, 새 학년을 앞두고 누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반으로 들어가던 순간이나, 수행평가를 위해 뜀틀 앞에  서던 순간이 꼭 그랬다.


여러 개의 눈과 귀가 나를 쳐다보고, 듣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마음속으로 '아이 캔 두 잇'을 수십 번 되뇌었다. 학교를 나서기 전 엄마와 현관문에 서서 외치던 것처럼.


꼭 붙잡아주던 엄마의 손은 없었지만, 나는 양손의 주먹을 움켜쥐곤, 할 수 있다를 되뇌었다.  어떤 일은 할 수 있다고 마음먹었던 것처럼 할 수 있었고, 어떤 건 귀가 빨개질 만큼  부끄러워여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중요했던 건, 할 수 있다고 되뇌면서 진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었고, 베란다에서 엄마가 지켜보는 것처럼,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며 응원할 거라는 믿음이었다. '아이 캔 두 잇'이라는 말은 그렇게 든든한 나의 마법 주문이었다.


어쩐지 요새는, '할 수 있다'라는 말보단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표가 자꾸 따라다닌다. 내가 엄마랑 외쳤던 건 느낌표가 붙은 '할 수 있다'였는데. 인간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깐, 부정적인 일에 신경을 쓰고, 내가 성공할 가능성을 따지며 점치는 것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게 삶의 전부는 아닐 텐데. 살아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잘' 살아가려면, 할 수 있다는 말을 더 많이 해야 하는데. 긍정의 힘을 믿어야 하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긍정에 자꾸 물음표를 덧댔다. 긍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는데, 부정의 힘을 믿으며 내 삶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나이를 이유로, 돈을 이유로, 이것저것 핑계를 대는 겁쟁이처럼. 결국 남아있는 건 확신이 없는 거울 속의 나였다.


부모님의 손을 꼭 잡고 상기된 얼굴로 등교하는 아이들을 아침마다 보니, 자꾸 그때가 떠오른다. 지금 나에겐 필요한 건 이리재고 저리재는 겁쟁이가 아니라 마법 주문을 되뇌는 혜리포터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현관문 앞에 다시 서야겠다. 그리고 그때처럼 다시 외쳐야겠다.

외치다 보면 정말 할 수 있었던 그때를 믿으며. 긍정은 결국 부정보다 더 나은 삶을 만들 거라고 믿으며. 나는 언젠가 잘 살고 있을 거라고, 할 수 있다고 외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마중 나와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지.

사실 믿지 않으면 별 수 없다.

아이 캔 두 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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