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창 겨어어어어울의 몇 번째 어의 어딘가. 하늘에선 은방울이 춤을 추며 내리고 거리엔 은빛 종소리가 높게 울려 퍼진다. 실외 기온이 대차게 떨어질수록 단열이 잘 안 되는 우리 집 화장실에선 뜨거운 김이 세차게 피어오른다.
상승과 하강,
직조된 명징함,
방구석 미장센.
어린 시절, 돌이켜보면 부모님 둘 다 일을 나가도 집에 홀로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연말의 틈바구니에서 느껴지던 기분 덕일테다. 그리고 내 마음은 그 기분을 설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역치는 꽤나 낮은 듯 상상이라는 미량의 자극만 주어도 콩닥콩닥 심장이 뛰곤 했다. 박동은 은은하고 낮게 머물렀으며 결코 거세지 않았다.
그 설렘이라는 기분의 대주주는 다름 아닌 내 유일한 외국인 친구였다. 이름은 케빈. 친구 해주는 대신에 친구 비용으로 TV수신료를 취해가는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겨울 친구. 땡땡이 무늬 파란 내복을 입고, 양껏 꾸민 트리와 리스를 거실의 한쪽 옆에 둔 채 TV 앞에 앉아 도둑들과 뜀박질하는 케빈의 모습을 보던 기억은 아직도 생경하다. 자란 지금이야 아이에겐 너무나도 잔혹하고 위험한 이야기라 말하지만, 당시의 나는 권선징악의카타르시스에서 헤엄치느라 바빴다. 그렇게 케빈을 처음 만난 이후, 매년 연말이 찾아올 즈음이면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반사적으로 무턱대고 찾아오는 그를 기다리며 설렘에 취하곤 했다.
우리의 친구 케빈은 TV속에 어린아이로 영원히 살아 숨 쉬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라 버렸다.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 하나만큼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잃지 않은 채 동심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한편에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물론, 혹자는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문명과 사회 속에서 동심을 놓친 채 사는 것이라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을 놓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놓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필요를 못 느꼈든, 지쳐서 잊어버렸든 간에 동심의 박동은 낮고 은은하기에 놓아버리지 않고 애써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 두드려 문을 열고, 손을 들어 가리켜야 한다.
왜 동심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하면 소소하게 아무 품 들이지 않고 확실하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동심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흠뻑 젖어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궁금하고, 재밌고, 설레던 어린 시절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시선과 마음을 잊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케빈과의 우연한 조우는 내게 가장 뚜렷한 동심의 편린이다. 창밖에 은방울이 춤을 추고 은빛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는 내게 처음 다가왔다. 나에게 그의 존재는 새로웠고, 그의 이야기가 재밌었기에 더 알고 싶었고, 속편을 기다리며 설렜다. 케빈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케빈을 안다. 내가 알면 된다. 비록 서로를 알지는 못하지만 나에게만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그때에 나는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하염없이 무해한 미소를 지닌 아이였다. 그때의 나를 잠시 돌아보다 지금의 내가 사는 세상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꽤나 새롭고, 재밌고, 설레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심은 어린 나의 것만이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도 사소한 시선과 마음으로 존재한다. 나는 이것이 동심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순기능이자 놓지 말아야 할 이유라 믿는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피는 꽃을 상상하면 동백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고, 그 뒤로 수선화와 매화 등이 떠오르겠다만 나에겐 은방울꽃이 가장 선명하다. 낮게 내려다보는 꽃이 아닌 높게 올려다보는 꽃. 은방울꽃 같은 하얀 눈이 온 하늘에 춤을 추듯 나릴 때 나는 어떤때보다 설레고 행복에 겹다. 그리고 그때엔 겨울을 맞이하던 마음(冬心) 속에서 나의 동심(童心)도 피어오른다. 예쁜 쓰레기라는 반박불가 별칭이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계묘년 입춘의 때가 오면 나의 마음도 조금은 더 따듯해져 있길 바라며, 하얗게 나리는 은방울의 꽃말을 반복하며 송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