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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Jan 28. 2023

EP.10 < 나의 바다 >

22.01.28 土






여러 핑계를 이유로 꽤나 긴 시간 동안 손에 글이 잡히지 않았다. 호기롭게 펜을 잡던 그때로부터 점점 멀어져 애써 세상을 둘러보기가 뜸해질 어느 저녁, 목에 참깨 가루가 한 움큼 껴있는 듯 따갑기 시작했다. 계묘년 첫 시련이 찾아오리라 직감했다. 뭐 다음은 여지없이 두통과 오한이 덮쳤다. 왜 '살이 끼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나는 몸살이라는 단어가 몸에 살이 낀다던지 하는 의미를 근간으로 하는 어원이 있을 줄 알았건만 검색해 보니 그냥 순우리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실 조금 안심했다. 무나 민간신앙을 믿진 않지만 살 같은 것도 낀 게 아닌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다. 호방하게 약을 먹지 않고 버틴 결과는 당연히 처참했고, 몸살에 굴복하고 몸뚱이에 복종하며 있는 약 없는 약을 다 갖다 바쳤다. 약 최고.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말자. 역시 약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다. 하하.



여자처자 무기력에 기력을 내어 글을 쓰는 지금도 코를 훌쩍이지만, 멍한 정신으로 몸살에 몸을 지지고 뒹굴던 동안 보았던 풍경이 있다. 바다를 보았다. 다만, 그 풍경은 자연의 것이 아닌 사람의 가슴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그곳에 각자만의 바다가 있다고 믿는다. 각자만의 바다에는 각자만의 기준, 철학, 가치관 등이 어느 일부로써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그 일부들은 쌓이고 쌓여 하나의 광활한 바다를 이루며, 삶의 모양이 각자 다르기에 바다의 풍경 또한 형형색색이다. 일원화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나는 이를 저마다의 바다라고 부른다.



몸이 아프면 소음에 예민해지기에 조용한 환경에 놓이게 되고 반강제적으로 본인의 호흡에 꽤나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호흡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들숨에 생을, 날숨에 명을 내어준다는 것을. 세상 모든 존재는 생명을 태워내는 대신 삶을 취한다는 것을. 이처럼 자그마한 호흡에서도 주고받음이 존재하기에 삶은 청사진만을 그려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나 또한 오랜만의 몸살에 호흡을 들여다보게 됐다.



나의 바다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성 하나가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바닷속 풍경에 몸을 맡기며 기꺼이 그 성의 꼭대기에 서서 지평선 너머에 있을 새로운 것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했다. 돛을 펼치며 새로운 여행을 떠나리라, 닻을 내리며 굳건한 내가 되리라. 맑고 경쾌하게,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를 발판 삼아 어디로든 떠나리라. 그렇게 다짐도 했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성이 모래로 세워낸 성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균형 있는 삶은 호흡이 지탱한다.

균형 있는 호흡은 파도와 같고,

들숨과 날숨은 밀물과 썰물과도 같다.

들숨과 날숨의 균형은 회복을 낳고

밀물과 썰물의 균형은 자정작용을 한다.

나의 바다에도 호흡과 파도가 필요하다.

나의 바다에도 주고받음이 필요하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양팔 저울은 각 팔에 '주기'와 '받기'를 매달 수 있다. 건강한 행복을 온전하게 영유하기 위해서는 이 균형을 평형에 가깝게 유지할수록 좋다. 사회적으로 한창 대두된 워라밸(Work Life Balance)이라는 개념이 직업적 측면에서의 균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제공하는 노동과 삶의 질이 균형적일 때 안정감을 느낀다. 사랑에서도 나의 언어와 당신의 언어가 균형 있게 오갈 때 비로소 따듯한 인력이 형성된다. 부모 자식관계에서도, 우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고받기의 특성은 대부분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양팔의 균형을 구태여 거스를 때 대두된다.

한쪽으로 기우는 주고받기는 그 균형이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균열이 일어나고, 주변인에게도 해로운 영향이 미칠뿐더러 자신에게는 더한 반작용을 일으킨다. 그리고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인지라 저울의 무게가 '받는 쪽'으로 기우는 것보다 '주는 쪽'으로 기울 때 그 균열은 더욱 심해진다. 일반적인 풋풋한 사랑에 한해서,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이야기일 텐데, 사랑을 주기만 할 때엔 관성처럼 받고 싶다는 심리가 솟구친다. 갈등 일으키기 딱 좋은 클리셰 같은 명대사가 있다. "나는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왜 안 줘?" 받기만 할 때도 문제이지만 주기만 한다면 더욱 빠르게 곪는다. 이처럼 건강한 사랑의 기저에는 주고받기가 기본 골자로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의 행복의 양팔 저울은 한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받기만 했던 사람이기에 나의 바다의 한 구석에는 오로지 개인만의 청사진으로 세워진 '모래성'이 있었다. 모래로 세운 성은 쉽게 새겨지는 균열로 인해 위태롭다. 밀물이 들이치며 한 번 허물어지고 썰물이 빠져가며 다시 허물어진다. 차츰 무너져 갔다. 그때야 말로 검푸른 심연의 구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때였고, 나의 온 바다가 스러진 모래로 인해 누렇게 물들어 있던 때였다. 학창 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스스로도 참 안쓰럽다고 할 정도로 세상을 혼자 살았다. 스스로를 외나무다리로 몰아가는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을 살았던 명백한 이유가 있고, 그래서 나의 저울은 기울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조금 더 마음이 열리면 풀어볼 이야기가 되겠다.



자그마한 호흡이 생과 명을 가져가고 삶을 내어주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사소한 무언가에 동한다. 정말 사소한 무언가 말이다.

눈길,

눈빛,

손길,

손짓,

목소리,

미소와 웃음,

조언과 격려,

응원과 지지,

사소한 선물,

누군가의 등

...

..

.

나의 문제는 주는 법을 알지만 그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주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받은 것보다도 더욱 거대한 무언가를 주려고 했기에 스스로가 버거워 주기를 포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 사소한 무언가를 주고받는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몇 없는 모든 이들로부터 이 모든 것을 나긋이 배웠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사소한 사랑이 깃들어 있고 따스했다. 그들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잔향을 남기고 돌아간 뒤 머지않아 다시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모래에 내리쬐는 태양은 그 어느 때 보다 반짝인다. 오늘의 나는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반짝이는 은빛 모래이다.



한 때는 나의 바다에 세워진 모래성이 불안하고 연약해서 싫었다. 모래로 세운 성은 누가 봐도 부서지기 쉽고 위태로운 성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렇다. 쉽게 부서진다. 하지만, 모래성은 허물어지더라도 다시 세워낼 수 있다. 높은 아파트는 무너졌을 때 복구하기 어렵지만, 모래성은 스러지더라도 바로 주변 모래들을 칠전에 팔기로 주워 쌓고 치덕치덕 다시 세울 수 있다. 내 곁의 이들에게 사소한 행복과 주고받는다는 것의 소중함을 배우고 나서, 모래성은 무너져도 언제든 다시 세울 수 있는 어떤 성들 보다 용기 있는 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마음속 한 편에 세워진 모래성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앞으로는 사소한 행복을 주고받으며 나의 바다를 가득 찬 쪽빛으로 물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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