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영화 역사에 컬러 필름이 처음 등장했다. 그 이전까지의 영화에서는 흑백의 배경에 흑백의 인물들이 말하고 행동했지만, 이준익 감독의 '동주',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가 그렇듯, 컬러 필름이 상용화된 이후의 영화에서 무채색은 하나의 예술적 표현 도구로써 채택이 되고 있다. 나는 색채 기술 발전의 과도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꽤나 아니 꽤꽤나 부럽다. 그들은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무채색으로 보이던 세상이 유채색으로 차오르는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본 이들일 테니까. 그들처럼 넘실대는 다채로움과 일렁이는 빛깔들을 목도하고 싶다. 감히 목도했던 순간의 감정을 경험해 보고 싶다. 내가 보았다고. 그 남자의 목소리는 푸른색으로 빛났고, 그 여자의 마음은 오렌지 빛깔이었으며, 그 검은 고양이의 눈빛은 사실 달빛같이 상냥한 눈빛이었다고. 그들이 목도한 순간은 단지 색이 차오르는 순간이 아닌 마음이 차오르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가득 칠해진 마음을 가슴에 안고 소리치고 싶다. 유채색의 풍경이 내 마음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고 열렬히 부르짖고 싶다.
물론, 이룰 수 없는 꿈인 것을 안다.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이룰 수 없는 꿈을 머리 한 구석에 담아 두고도 나는 나 자신에게 날 세운 감정의 칼날을 들이밀지 않는다. 다채로운 빛깔로 물든 마음을 안고 사는 것? 얼마나 좋겠어. 모든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과 우러나오는 상냥한 시선과 말투, 목소리들. 너무나도 이상적인 모든 것들이 내 머리와 마음에 칠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난한 말들로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아도 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사람이기에 완벽하면서도 이상적인 존재가 될 수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믿는다. 역사 속 한 순간에 있지 않아도, 소설과 영화 같은 순간이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는다.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고 갈급하게 손을 뻗는 것보다 가끔은 뻗은 손을 잠시 거두어들이고 별을 별로써 가만히 바라봐주는 것도 소중하다고 믿는다. 일확천심(一攫千心), 단번에 수확된 마음은 옅고, 금처럼 반짝이는 마음들은 시나브로 짙어지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내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돈, 명성, 지위 따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떵떵거릴 돈이 있을 리 만무한 가난한 20대 청년이다, 거룩한 업적을 이룩한 것도 아닐뿐더러, 뚜렷한 직업적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가난은 현재진행형이고 이 가난의 맺음말이 언제 쓰일지도 모른다. 그저 재산과 명예가 가난하다면 마음이라도 가난하지 말자는 태도로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혹시, 쥐뿔도 없는 놈이 너무 이상적인 언어들로만 꾸며댄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맞다. 맞으니까. 내 활동명은 김그늘이다. 내 안의 어두운 그늘이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선선한 그늘로 드리워질 그날을 꿈꾸며 그렇게 지었다. 이름부터가 이상적인 걸. 나는 이런 사람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 같은 순간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기에 찾아오지 않는다. 찾아오진 않지만 찾아갈 수는 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다채로운 빛깔을 띄게 될 순간을 향해 걸어갈 수는 있다. 그 걸음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나의 '색(色)'이다. 나는 나의 색이 나의 뿌리, 나의 바다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는 것, 나아가 그것이 '나' 그 자체가 된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조차 겨누어 본 적 없다. 바라봤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것들과 모든 곳들, 모든 이들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애써 낙관적이거나 온건하게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두 눈이 아닌 온 마음 다해 있는 그대로를 바라봤으면 좋겠다. 나를 말하는 색은 깊은 내면에 있기에 눈에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봤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봤던, 바라보는, 바라볼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이 채색도구가 될 테니, 그 순간의 마음가짐을 한 아름 껴안고 자유롭게 색칠했으면 좋겠다.
흔히들 매력이 없고 독특한 구석이 없다는 말을 무채색이라는 단어로 비유하지만 사실 무채색도 색이다. 검은색도 색이고 흰색도 색이며 이름이 없어도 색이다. 그 색이 어떤 색이건 중요치 않다. 타인의 색에 이맛살이 으등그려진다면 나의 색과 상대방의 색은 서로 섞이지 않는 색일 뿐인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우열을 가리고, 배척하고, 비난하고, 더럽힐 필요는 없다. 세상에 잘못 칠해진 색은 없고, 저마다의 색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선명한 색을 감추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적고 보니 꽤나 바라는 것이 많지만, 마음은 늘 곱연산으로 계산된다고 믿기에, "뭐, 다다익선이지 않겠어" 라며 살아보는 요즘이다. 나에게서 당신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지만 결국 돌고 돌아 나에게로 향하는 편지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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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 부모님 집에 머물 때면 매일 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뭇한 바다를 천천히 바라본다. 밀려오는 파도와 쓸려나가는 파도의 소리를 듣다 보면 그 소리가 자못 고요하고 평온하게 느껴진다. 낚싯배의 조명 없이는 수면조차 보이지 않는 그 가뭇한 밤바다에게서 왠지 모를 안온함을 느꼈던 것은, 따듯하게 빛나던 낮의 쪽빛을 이슥한 밤에도 잃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다는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자신의 색을 말했다. 그 바다는 그랬다. 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바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