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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Nov 22. 2024

아내와 탁구를 쳤다.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아파트에 탁구장이 생겼다.


주민 여러분을 위해 단지 내 헬스장 옆에 탁구장을 마련하였으니 많은 이용 부탁드린다는 관리사무소의 안내문에는 묘한 뿌듯함이 묻어있었다.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분들이 일머리 좋고 성실하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뿌듯함에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개장 안내문을 보고 나서 며칠 뒤에 아내와 함께 탁구장을 찾았다. 안내문에서 은은히 묻어 나오던 관리사무소 측의 뿌듯함이 조금은 민망하게 느껴질 만큼 탁구장은 조촐했다. 탁구 다이 하나와 탁구채 두 개, 그리고 탁구공 한 세트.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자그마함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아담한 탁구장은 그래도 깔끔했고 나와 아내, 우리 둘 외의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와 아내는 탁구를 쳤다. 아내는 난생처음, 나는 대략 한 15년..? 정도만에 쳐보는 탁구. 운동 신경이 영 변변치 않은 나지만 그래도 쳐보긴 쳐본 덕인지, 아니면 아내의 운동 신경이 나보다도 더 변변치 못한 덕인지 내가 아내보다 탁구를 더 잘 쳤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오른손잡이인데 그녀는 치기 딱 알맞은 높이와 속도의 공이 본인의 오른편으로 와야만 가까스로 공을 내게 다시 넘겼다. 내가 쳐서 넘겨주는 공이 어쩌다 본인의 왼편으로 향하거나 조금이라도 속도가 빠르거나 높이가 적당치 못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아내는 몸개그를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마냥 귀엽기만 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녀는 이런 거, 그러니까 나름의 대결 구도가 성립되는 대부분의 것에서 일방적으로 발리거나 하면 조금 성질을 내는 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편이라는 걸 무척 잘 알고 있기에 난 슬슬 긴장을 하며 매우 집중력 있게 공을 쳤다. 그녀가 치기 딱 좋은 속도와 높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다가 말이다.


초반에는 헛방질을 연달아하던 나의 아내도 내가 집중하며 저렇게 공을 치자 곧잘 공을 맞춰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묘한 만족감과 뿌듯함을 얼굴에 슬쩍 띄우기 시작했다. 난 슬쩍 뿌듯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탁구장 개장을 알리던 관리사무소의 안내문이 생각나 피식 웃겼으나 실제로 웃지는 않았다. 왜 웃냐는 질문이 들어오는 순간, 조금 피곤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아내와 처음 탁구를 같이 친 날, 우린 17회(공이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걸 1회로 쳤을 때)의 랠리를 최고 기록으로 만들어냈고 그렇게 일단은 귀가했다. 17이란 숫자는 탁구에 맛을 들이기엔 충분히 숫자였기에 우린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쳤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탁구 실력은 늘어갔다. 특히 아내의 실력 향상은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취월장한 아내와 함께 나는 오늘도 저녁을 먹은 후에 탁구장을 찾았다. 그리고 아내의 일취월장에 호응하기 위해 나는 슬슬 탁구채로 주접을 떨었다. 첫날에는 눈치 보며 두어 번 쳤던 드라이브를 조금은 눈치 안 보고 펑펑 쳐대기 시작했고, 여기서 더 나아가 되도 않는 수비형 탁구(일명 '깎기'라고 하는 것)에 도전하기도 했다. 여기서 참고로 말하자면 탁구에서 드라이브와 깎기는 공을 치는 매커니즘 자체가 완전 정반대다. 드라이브는 공에 '탑스핀'을 걸어 치는 것이기에 공이 빠르게 날아가고 마치 야구의 커브볼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공이 급하게 떨어진다. 반면, 깎기는 탁구공에 ‘백스핀’을 먹이기 때문에 공이 좀 둥실 떠가는 느낌으로 날아가고 탁구대에 공이 떨어진 후의 움직임도 드라이브와는 전혀 다르다. 어쨌든 오늘 나는 아내의 탁구 실력이 꽤 늘었다는 핑계 뒤에 숨어 약간은 신을 내며(물론 그래도 적당한 눈치는 보며) 드라이브도 치고 깎기도 치고 했는데 참 재미있었던 건 나의 그런 주접을 보며 아내가 내게 보여줬던 반응이다.


사실 오늘은 저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이렇게 길게 썰을 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드라이브와 깎기는 공이 날아가는 궤적, 속도, 공이 탁구대에 떨어진 후의 움직임 등이 아주 확연하게 다르다)


먼저 난 드라이브가 성공적으로 들어간 후에(그러니까 아내가 공을 받아내지 못한 후에) 아내에게 공이 어떠했느냐 물었다. 공이 빠르게 날아오다가 갑자기 훅 떨어지지 않았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내는 맞다고, 진짜 공이 빨리 날아오고 또 뚝 떨어졌다고 답해주었다. 난 신이 났다. 그리고 다시 적당히 속도와 높이의 공을 아내의 오른편으로 곱게 몇 번 보낸 후, 이번에는 깎기를 나름 멋지게 성공시켰다. 그리고 나는 또 아내에게 공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공이 평소랑은 좀 다르지 않았냐고 말이다. 이번에도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맞다고, 평소랑은 달랐다고 답했다. 나는 극도로 신이 났고 그때부터 드라이브와 깎기를 무진장 쳐댔는데 그중에서도 깎기를 더 빈번하게 쳐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깎기가 또 멋지게 성공했을 때(역시 아내가 공을 받아내지 못했을 때) 아내에게 방금 전 공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의 착한 아내는 눈을 똥그랗게 뜨며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공이 진짜 빠르고 또 뚝 떨어졌어!"


응..? 공이 진짜 빠르고 뚝 떨어지는 건 깎기가 아닌 드라이브를 쳤을 경우인데...     


아...! 난 깨달았다.

나의 착한 아내는 사실 드라이브가 어떻고 깎기는 어떻고 나발이고 일단 당장 눈앞에 날아오는 공을 제대로 맞추는 데 급급했구나. 그 와중에 그래도 지 서방이 신나서 떠들어대니까 맞다고 그렇다고 맞장구쳐주고 했던 것이었구나..! 그런데 쳐줘야 하는 맞장구의 내용을 완벽 숙지하는 데까지는 미처 여력이 없었던 것이었구나..!


드라이브니 깎기니 주접 좀 덜 떨고 공을 좀만 더 치기 좋게 넘겨주고 그랬더라면, 그러면서 이제 슬쩍 드라이브는 어떤 거고 깎기는 어떤 거다라고 설명을 좀 더 천천히 잘해줬더라면. 그랬더라면 나의 아내가 드라이브에는 드라이브에 맞는 맞장구를, 깎기에는 깎기에 맞는 맞장구를 쳐줬을 텐데.. 난 그만 너무 신을 내버렸고 드라이브도 잔뜩, 깎기도 잔뜩 치며 설명도 휙휙하고 넘어갔었던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 나의 잘못이다.

백스핀을 잔뜩 머금은 채 날아든 깎기 공을 보고 마치 드라이브를 본 것처럼 공이 진짜 빠르고 뚝 떨어졌어! 라고 해맑게 답한 나의 아내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나의 아내가 정말 착하다는 것을, 조촐한 탁구장을 통해 깨닫게 해 준 관리사무소 직원 일동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24. 11. 22.

다시 오른쪽으로 공을 잘 넘겨줄 것을 다짐하며,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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