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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tterist Nov 23. 2024

롯데택배 트럭은 사과처럼 빨갛다.

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내가 집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지난 어느 날의 일이다.


볼 것이라곤 날 가로막는 빨간불밖에 없는 그곳에서 지루하게 초록불을 기다리던 중 내 눈앞에는 또 하나의 빨간색, 그것도 아주 시뻘건 빨간색이 나타났다. 롯데택배의 택배차량이었다.


혹시 롯데택배의 택배차량을 본 적 있는가? 잘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혹시 타이어를 제외한 차량 거의 전체가 아주 시뻘겋게 도색된 택배차량을 본 적이 있는가? 가물가물한데 아마 있는 것 같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 롯데택배 택배차량을 본 적 있는 사람이다.


롯데택배 택배차량은 아주 새빨갛다. 물론 차량 중간에 ‘롯데택배’라는 글자와 딱히 고심해서 디자인한 것 같진 않은 적당한 하트 모양이 하얀색으로 조금 들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몹시 궁색할 뿐, 결코 빨간색의 압도적 위용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로 따지면 빨간색의 비중이 대략 95% 정도일까? 롯데택배의 택배차는 그 정도로 새빨갛다. 때문에 이 롯데택배 차량은 길거리에서 아주 쉽게 눈에 띄고 이 차의 모습을 본 사람은 본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한 몇 초 간은 ‘빨갛네..’란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 대단한 일이다. 비록 단 몇 초 간이긴 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어떤 한 방향으로 이렇게나 거칠게 몰아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롯데택배의 빨간 차량은 그 대단한 일을 거뜬히 해낼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 어쨌든 참으로 빨갛다는 이야기다.


그 대단한 빨간색(롯데택배 차량이라 칭하는 것보단 움직이는 빨간색이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을 본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한 몇 초 동안 ‘와...진짜 빨갛다...온통 빨갛네...(촌스러..)’ 정도의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빨간색에 무아지경으로 취해있던 나는 문뜩 또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근데 다른 사람 눈에도 저 빨간색이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 그런 빨간색으로 보이는 걸까?
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색과 내 눈에 보이는 색이 정말 같은 색일까?
그걸 대체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지..?'
 


라고 말이다.


이건 정말 순식간에 스친 생각이었는데 난 이 생각에 꽤나 큰 흥미를 느꼈기에 이후로도 종종 한가할 때마다 이 생각을 끄집어내 혼자 고민하곤 했다.


이 고민의 초창기에는 내가 그냥 또 허튼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자, 빨간 택배차가 지나갔지? 네 옆사람에게 물어봐. 방금 지나간 차가 무슨 색이었냐고. 빨간색이었다고 하겠지. 그치? 거봐, 네가 빨갛게 보는 건 다른 사람도 빨갛게 보는 거야. 오케이?'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이건 그렇게 싱겁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보고 여럿이 동시에 ‘빨갛다’고 말한다는 건 이들이 동일한 언어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을 확인해 줄 뿐, 이들이 각자의 뇌로 인식해 내는 이미지가 동일하다는 것은 전혀 증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응? 이게 무슨 소리냐고?


자,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당신이 말과 글을 처음 배우던 때를 생각해 보라. 혹 너무 옛일이라 가물가물하다면 그냥 그러고 있을 어떤 어린아이를 상상해 보라. 어린아이들은 말과 글을 배우면서 ‘색깔’에 대해서도 학습한다. 그리고 그 학습의 방법이란 아주 단순하다. 무언가를 보여주며 ‘이건 이런 색이야’라고 가르쳐 주는 것. 빨간색에 대해 배울 땐 보통 사과나 딸기 정도일 것이다. 노랑에 대해서는 아마 바나나 그림이 독점을 하고 있을 것이고 파랑은 바다나 하늘, 초록에 대해서는 나뭇잎 따위의 점유율이 높을 것이다. 주황은 물론 오렌지나 귤일 테고 말이다. 당신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누구누구야, 이걸 보렴~ 자, 이런 색을 바로 빨간색이라고 한단다~?"


아! 그렇구나! 이런 색이 빨간색인 거구나!

영특한 아이라면 아마 "오 그럼 선생님 옷도 빨간색이고 롯데택배 차량도 빨간색인 거네요!" 정도의 말을 덧붙였을 수도 있겠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이런 색은 이런 이름으로 부른단다’ 라는 가르침으로 색을 배웠다.


그리고 바로 이게 문제인 것이다.


계속 예를 들어보자. 당신과 철수가 있다. 당신과 철수는 시신경과 뇌의 일부 감각 매커니즘이 다르다고 하자. 그래서 당신이 빨간색이라 인식하는 색을 철수는 ‘당신이 파란색이라고 부르는 색’으로 인식한다고 하자. 철수는 당신이 보기엔 빨간 사과도, 그리고 당신이 보기엔 빨간 롯데택배 차량마저도 모두 다 ‘당신 눈에 보이는 빨간색’이 아닌 ‘당신 눈에 보이는 파란색’으로 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철수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색깔에 대해 배웠다. 철수의 선생님 역시 사과 그림을 보여주면서 철수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철수야, 자 이런 색을 바로 빨간색이라고 한단다’ 라고 말이다. 헌데 앞서 말했듯, 철수는 당신과는 시신경과 감각 매커니즘이 다르다. 당신에겐 빨간색으로 보이는 사과가 철수에겐 당신이 파랗다고 여기는 색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걸 보여주며 철수의 선생님은 ‘철수야, 이런 색을 빨간색이라고 한단다’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로 어떻게 되었겠는가?


당신이 빨간색이라 여기는 사과도, 그리고 물론 롯데택배 택배차량도 모두 다 철수에겐 당신이 파란색이라 부르는 색으로 보인다. 당신이 보는 세상과 철수가 보는 세상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당신은 물론, 철수 역시도 사과와 롯데택배 차량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빨간 사과, 그리고 더럽게 시뻘건 택배차량이다’ 라고 말이다.


왜? 철수 역시도 '이렇게 보이는 색을 이런 색이라고 한단다'라는 식으로 색을 배웠으니까.


결국 당신과 철수는 같은 표현을 하고는 있으나 둘이 보는 세상은 사실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이처럼 색을 배웠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배운 것은 ‘색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각자가 바라보는 세상이 타인에게도 정말 그러한 세상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내가 보는 세상은 다른 이가 보는 세상과 어쩌면 완전히 다를 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까지가 롯데택배 택배차량을 보고 난 후에 내가 한 생각이다. 빨간, 아주 새빨간 롯데택배 택배차량을 보고 난 후에 말이다.



결국 나는 이렇게

'내가 보는 세상이 남이 보는 세상과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저 시뻘건 롯데택배 차량이 다른 사람 눈에는 푸른(내가 생각하는 푸른색) 바다의 색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결론에 대한 나의 확신은 90% 정도다. 완벽하게 확신하는 건 아니지마는 어느 정도는 생각이 굳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 결론은 한편으로는 꽤 마음에 드는 결론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좀 오싹한 느낌, 마치 굉장히 광활한 공간에 나 혼자 뚝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그래서 스스로가 너무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나는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논리 전개 어딘가에 허점이 있었기를, 그래서 내 결론이 잘못된 결론이기를, 아직 10% 가량 남은 미심쩍음이 이 결론을 뒤집어주기를, 사실은 내 눈에도 철수 눈에도 그리고 당신 눈에도 이 세상이 똑같게 보이는 것이기를 조금은 바란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아예 똑같게 보이는 건 영 지루할 것 같기도 하다.


'대동소이'가 좋겠다.



2024. 11. 23.

하늘은 파랗고 나뭇잎은 노랗거나 빨간 늦가을에.

레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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