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오랜만에 집에 모친께서 방문하셨다.
모친께서 거주하고 계신 나의 본가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차로는 5분(네이버 지도 기준), 걸어서도 20분(내 도보 기준)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운데 간만에 방문하신 모친의 모습은 마치 머나먼 고향집에서 버스 두세 번 갈아타고 아들집에 찾아오는 옛 드라마 속 우리네 어머님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행색이 고되어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양손에 뭔가가 바리바리 잔뜩 들려있었다는 말이다.
그 바리바리한 것들에 당혹감을 표할 새도 없이 모친께서는 곧바로 이런저런 설명을 쏟아내셨는데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설명이 하나같이 굳이 필요치 않은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모친께서는 누구도 쉽게 알기 어려운 중요한 무언가를 마치 내게만 설명해 주는 것처럼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당신의 설명을 이어가셨다.
“이건 고기야, 구워 먹어” (누가 봐도 구워 먹어야 할 것처럼 생긴 시뻘건 고기였다)
“이건 장조림이니까 밥이랑 같이 먹어” (누구나 장조림은 밥과 함께 먹을 것이다)
“이건 갈비탕이니까 데워먹어” (대단히 꽝꽝 얼어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설명에, 그리고 너무나도 막대한 양에, 그리고 너무나도 일관된 내 취향의 음식들(나는 고기를 좋아한다)에 말문이 막혀 처음에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으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말들로 모친의 당연한 설명에 화답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참 진짜 이런 것 좀 해오지 말라니까..
아니 참 진짜... 아니 이거 언제 다 먹으라고..
아니 참 진짜 맨날 여기저기 아파서 끙끙거리면서 왜 자꾸..
아니 참 진짜.. 아이고..”
아니, 사실 이건 ‘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추임새 혹은 감탄사에 가까웠으리라. 말이 말일 수 있으려면 어쨌든 듣는 이가 이를 듣는 척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일진대 나의 말은 일단 내뱉어는 졌으되 모친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아무 의미가 없는 너무도 당연한 모친의 음식 설명과 마찬가지로 나의 무용한 말들은 장조림과 갈비탕, 그리고 구워 먹어야 하는 고기 주변에서 그저 부유할 뿐이었다. 하지만 물론 나 역시도 모친의 음식 설명에 제대로 장단을 맞춰드렸던 적은 없었으니 상대방의 말에 서로 얼마나 귀를 기울였는가 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모친과 나의 대화는 대단히 공평했던 셈이다. 0:0으로 말이다.
아무튼, 모친께서는 한바탕 폭풍 같은 먹거리 총공세를 펼치신 후 약 10여 분 만에 다시 본가로 돌아가셨고(부리나케 돌아가시는 모습 역시 옛 드라마 속 우리네 어머님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했다. 최근에 또 무슨 드라마, 혹은 인간 극장 등의 다큐를 보신 게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 반, 온갖 고기 먹거리가 생겨서 기분 좋은 마음 반을 가진 채 냉장고에 음식을 잘 정리해 채워 넣었더랬다.
이게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데 이 일이 있기 일주일 정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건 총각김치니까 좀 익혀 먹어”
“이건 만두 빚은 거니까 삶아 먹어”
“이건 청국장이니까 끓여 먹어”
똑같이 '이건'으로 시작되고 똑같이 '먹어'로 끝나는 문장, 하지만 확연하게 다른 메뉴. 그랬다. 지난주에는 또 한 명의 엄마, 장모님이 방문을 하셨더랬다.
저때는 아내도 집에 같이 있었기에 ‘아니 참 진짜’로 시작하는 무의미한 타령이 이중창으로 진행됐었는데 그 이중창은 단지 딱 두 배로 시끄럽기만 했을 뿐, 독창에 비해 딱히 더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다. (아마 떼창이라 한들 엄마들이란 존재는 이를 가볍게 무시해 낼 것이다)
어머님이 넣어놓고 가신 총각김치와 엄마가 넣어놓고 간 장조림을 꺼내 상을 차려 먹으면서 나는 고민했다. 엄마들은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물론 나도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엄마에게 이렇게까지 무언가를(심지어 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돈도, 시간도, 정성도 무척이나 많이 들어가는 그런 무언가를) 계속 선물해 주지는 않는데 엄마들의 사랑이란 건 대체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뭐.. 엄청 거대하겠지.. 엄마들이 원래 그렇지 뭐..’ 라는 쉬운 생각으로 금방 결론을 내리고 생각을 치워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날은 장조림과 총각김치가 유독 맛있었던지라 밥을 두 공기 먹었고 그 덕에 생각을 조금 더 길게 할 수 있었으므로 나는 쉬운 결론은 배제한 채 사뭇 진지한 자세로 고민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민의 주제가 무려 엄마일진대 내깟게 조금 진지해진다 한들 이 고민의 답이 바로 나올 리는 없었고 나는 ‘엄마들은 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라는 거대한 미스테리를 풀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의심해 봄직한 것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내게 외할머니 되시는 분이 살아 계셨을 적에 보여주셨던 이러저러한 행적이었는데, 이 행적이란 것이 사실 참으로 대단하긴 했었다.
나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엄마의 엄마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었다. 혹시 가는 곳마다 딸이 있는 그런 할머니를 당신은 본 적 있는가? 서울과 경기도 곳곳은 물론이고 전국 팔도 모든 곳에 자신을 “엄마!!”라 부르며 안기는 딸을 둔 그런 할머니를 당신은 본 적이 있는가? 나의 외할머니, 그분이 바로 그런 할머니셨다. (특히 남대문 시장에는 거의 딸 군단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헌데 이 ‘엄마’라는 것은 대를 거듭하면 그 기능이 제곱으로 증폭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라는 존재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소보루빵이 맛있단 말을 내가 슥 내뱉기라도 하면 바로 그다음 날부터 우리 집에는 외할머니가 사 오신 소보루빵이 늘 가득했었다. 내가 또 다른 어떤 빵이 맛있다고(혹은 맛있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무언가를 보며 내가 신기해하기라도 하면 며칠 내로 나는 그 무언가를 실물로 볼 수 있었다. 텔레비전 속의 그 신기한 무언가를 어딘가에서 외할머니가 꺼내오신 덕분에 말이다.
외할머니가 꺼내오신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랍스터였다. 외할머니는 대체 어디서 랍스터를 가져오셨던 것일까? 요즘은 노량진, 아니 좀 큰 마트에만 가도 누구나 어렵지 않게 랍스터를 살 수 있지만 그땐 시대가 결코 그런 시대가 아니었는데, 아니 랍스터가 희귀했던 것은 둘째치고 일단 ‘랍스터’라는 단어부터가 매우 생소한 단어인 그런 시대였는데 나의 엄마의 엄마는 랍스터를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해오셨던 것일까?
이미 오래전에 굳이 세상을 떠나셨기에 이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외할머니가 사다 주셨던 그 많은 먹거리들의 맛만큼은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기억이 난다.
총각김치와 장조림에서 바로 그 맛, 소보루빵과 랍스터 비슷한 맛이 난다.
엄마들이 준 무언가들은 맛이 다 비슷한가 보다.
내일 또 먹어야겠다.
2024. 12. 19.
배가 불러도 너무 부른 어느 날에,
엄마의 엄마의 딸의 아들인 레터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