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편집자의 시시콜콜.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김훈, '칼의 노래' 서문 중에서.
작가 김훈의 문장은 거의 대부분이 대단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경외스러운 것은 ‘칼의 노래’ 서문에 적혀 있는 저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부분은 글로서는 단박에 읽히지만 그 뜻마저 단박에 이해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세련되다. 이는 글쓴이에게 범상치 않은 깊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참을 고민하면 그 깊이를 어렴풋이 짐작 정도 할 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의문이 남는다는 점에서도 저 글은 다시 한번 참으로 경이롭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저 글을 곱씹었건만 끝내 남아있는 의문, 나의 그 의문은 이런 것이다.
'그해 겨울에 자주 아팠던 김훈은 그래서 과연, 모든 연민을 버려내는 것에 성공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김훈이 저 문장을 쓴 것은 2000년 겨울의 일이었다. 눈이 유독 많이 왔다던 2000년의 겨울, 김훈은 칩거 중이었다. 그해의 가을까지만 해도 김훈은 ‘시사저널’ 지의 편집국장이었으나 그는 2000년 가을, 돌연 사직서를 내고 초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직서와 칩거의 배경에는 김훈이 한겨레21과 진행했던 한 인터뷰가 있었다.
그 화제의 인터뷰 기사 속에서 김훈은 이야기했다.
내가 안 썼으면 딴 놈들이 썼을 테고... 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때 나를 감독하던 보안사 놈한테 이런 얘기를 했지. 내가 이걸 쓸 테니까 끌려간 내 동료만 때리지 말아달라. 걔들이 맞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왔어. 진짜 치가 떨리고... (중략)
한겨레21, 쾌도난담 327호, '위악인가 진심인가' 중에서 김훈의 말.
이 인터뷰 이후 김훈은 후배 기자들의 거센 항의를 홀로 마주했는데 그건 그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그 ‘내가 쓴 것’이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 육사 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김훈은 신군부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자신의 손으로 써냈었다(김훈은 이를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입으로 담담히 밝혔고 ‘힘에 굴복했다’고 순순히 인정했으며, 그 인정에 따르는 항의에 특별히 저항하지도 스스로를 변호하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초야로 향했다.
그때 그 시대가 아무리 모든 신문사에 보안사 군홧발이 상주했던 서슬 퍼런 시대였다 할지라도, 동료 선배 후배들이 하나둘씩 그 군홧발에 끌려가는 공포의 시대였다 할지라도, 결국 모든 신문사가 다 용비어천가를 써내야만 했던 그런 시대였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원치 않는 똥물을 결국 누군가는 반드시 뒤집어써야만 했던 그런 시대였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느냐, 왜 당신은 끌려가지 않았느냐고. 보안사가 물러간 훗날에 그렇게 비판을 하는 것은 아마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절절한 시대 안에서 동료들의 희생에 치를 떨며 굴욕적인 글을 손수 써내는 것보다는 아주 분명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쉬운 일이 워낙 거세게 몰아쳤던 탓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를 핑계로 초야로 향할 생각이었던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김훈은 그렇게 초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세상에 대한 모든 연민을 홀로 버려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은 그가 꽤나 많은 것에 연민을 품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리기에 이렇게 훗날, 김훈을 생각하는 나는 괜히 마음이 저릿하다.
그가 버려내고 싶어 했던 모든 연민은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품어져 있었을까?
똥물의 냄새조차 맡아보지 못한 주제에 ‘누구도 원치 않는 똥물을 왜 굳이 뒤집어썼냐’며 그를 핍박하던 후배 언론인들에게도 그의 연민이 깃들어져 있었을까? 원치 않는 글을 써내라 겁박하며 총칼을 들이밀던 자들에게도 혹시 그의 연민이 깃들어져 있었을까? 인간에 대한 연민이란 게 무엇인지, 그걸 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는 전혀 관심 없이 그저 저마다의 삶을 살기 바빴을 만인에게도 혹시 그의 연민은 깃들어져 있었을까?
김훈이 아니기에 이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짐작건대 그가 품었던 연민은 대단히 넓고 뿌리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감히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는 그의 뿌리 깊은 연민을 결국 버려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는 그의 말은 비록 짧지만, 그 역시도 결국은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려내지 못했을 것이란 기대를 품게 하기엔 충분히 길기에, 그렇기에 나는 그가 결국 연민을 버려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내 마음은 다시 한번 또 저릿하다.
김훈의 연민에 대한 저 저릿한 문장이 쓰여있는 책, ‘칼의 노래’는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헌데 그 충무공이 큰 칼을 들고 계신 곳, 광화문에는 그간 과연 얼마만큼의 연민이 놓여져 있었던가?
광화문에는 그 어떤 연민도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광화문에도, 그리고 광화문의 수많은 뒤에도 연민이란 단어가 깃들 자리는 바늘만치도 보이지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좌가 우를, 우가 좌를,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어린 세대가 늙은 세대를, 늙은 세대가 어린 세대를 결코 연민하지 않고 오직 증오하는 모습뿐. 연민은 사라진 지 오래고 크게 말하는 이와 널리 글 쓰는 이들은 오히려 증오를 부추기기만 할 뿐이다. 증오에는 박수가 쏟아지고 무수한 엄지가 박힌다. 광화문에서도, 광화문의 수많은 뒤에서도 말이다.
간혹 자성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양쪽에서 쏟아지는 회색 매질에 못 견뎌 초야로 돌아가버린 지 오래다.
우린 대체 어쩌자고 그러는 것인가? 정말로 다 없애버리기라도 할 요량이란 말인가? 매듭이 더럽게 꼬였다 한들 결국 풀어내야 그게 줄일 수 있는 법인데 어쩌자고 우린 다들 매듭에 칼질할 생각만을 한단 말인가? 모두가 김훈처럼 칩거를 할 수는 없는 법이고 우린 결국 또 함께 살아가야만 할진대 대체 어쩌자고 우린 그러는 것인가? 정말 모두가 이미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려냈다는 말인가? 한해 겨울 동안 자주 아파도 성공하기가 힘든 그 서늘한 일을 정말 모두가 이렇게 성공해 냈다는 말인가? 연민을 버려낸 빈자리에는 증오만이 가득 찰 뿐인데 삶을 어떻게 증오와 함께 살겠다는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의문은 많으나 이 모든 의문에 어스름하게라도 차마 답을 내지 못하겠는 것은 내가 아직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려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무르고 우둔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해야 하는 말은 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말의 어조란 때론 강해야만 하는 법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말에도 마지막 한 줄기 연민만은 버려지지 않았으면, 결국 그렇게 마지막 한 조각의 연민을 버려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그런 무른 이들이 다치거나 아픈 일이 결코 없었으면, 그리고 행복했으면 한다.
물론 무르지 않고 이미 단단한 자들은 지금은 그런 한가한 말을 할 때가 아니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에 대한 연민을 모두 버리지는 말자는 말에 딱히 특별한 때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역시 내가 무르고 우둔한 탓일 것이다.
2024. 12. 21.
다시, 김훈을 생각하며.
레터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