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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Aug 31. 2022

끈질김

내가 한다면, 난 해

어릴 때 장애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때부터 장애에 대한 세상의 선입견들과 부딪히게 된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선입견은 "넌 장애인이니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도 이해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색안경 낀 시선이었다.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살이 되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1년 간 병원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던 탓이다. 그렇게 병원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우리 가족은 내 학교 생활을 걱정했다. 앞으로 학교를 아예 안 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함께 병원 치료를 받던 아이들 가운데에는 전국에 있는 병원을 돌아다니며 교육보다는 치료를 택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와 부모님 모두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내가 휠체어를 어렸을 때부터 탔던 만큼 '다름'에 대한 시선들을 맞닥뜨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고,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에서 나를 교육시키기를 원하셨다. 이 '장애인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중에 차차 다루기로 하자.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 가족은 그 당시 경기도 의정부시에 살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서울에 위치한 모 사립 초등학교에 입학할 요량이었다. 나의 재활에 있어서 수영과 승마가 그렇게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해당 초등학교에 이런 프로그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전화로 해당 학교의 입학 상담을 받던 와중, 교장에게 매우 어이없는 말을 듣게 된다.


"장애인이면 장애인 학교나 가야지, 어딜 감히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고 합니까?"


나중에 어머니께 전해 듣기로는 해당 교장이 나에 대한 소개 (글도 잘 읽고, 영어도 할 줄 알고 등등)에는 다 좋다는 식으로 일관하다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저렇게 태도가 돌변했다고 한다. 어쨌든 부모님은 이 학교에는 절대 나를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셨고, 나는 이듬해에 당시 거주하던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참고로 나는 12년 동안 정규 교육을 받으면서 단 한 번도 장애인 특수 학교에 재학하지 않았으며, 다른 친구들과 같은 수업을 듣고 동일한 조건 아래 학업 능력을 평가받았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특수 학교에 다니는 건 아니다.


어찌됐건 그 사립 초등학교의 교장의 매우 편협한 시각은 오히려 내게 오기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나는 '당신이 그 학교에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 과정에서 공부에 엄청난 흥미를 느꼈다. 재활 치료는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하며 몸 상태를 유지시켜 놓아도, 근육 수술을 받거나 잠시 치료를 쉬게 되면 바로 몸이 무너져서 허무할 때가 많았다. 꾸준히 운동을 해도 하루아침에 몸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반면 공부는 내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정직하게 결과가 나왔다. 어려운 수학 문제들도 계속 풀다 보면 어느새 내 것이 되면서 확 실력이 느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성취감과 짜릿함을 한 번 맛보고 나자, 나의 장애와 학습 능력은 별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경우에는 그러했지만, 다른 분들은 아닐 수도 있다. 혹시나 이 글로 인해 다른 장애인 분들의 학습 능력에 대해 또 다른 선입견이 생길까봐 노파심에 적어본다.) 공부에서만큼은 뒤지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나를 '장애인'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던 또래들이 매 해 첫 중간고사/기말고사 성적이 나오고 나면 (초등학교 때는 종종 올백도 맞곤 했다) 그 뒤로 나를 인정해 주던 순간들도 좋았다.


이런 경험들을 몇 차례 하고 나니, 나의 장애만 가지고 나의 전부를 판단하려 하는 불편한 생각들을 아예 전환시키고 싶었다. 중학교에서 필수로 들어야 했던 체육 수업이 그 예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체육 수업이나 현장체험학습 등 몸을 써야 하는 활동에서는 초등학교 특수반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셨는데, 중학교부터는 특수반이 개설되어 있지 않은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의미가 없어졌다. 특히 체육 시간 시작 직전, 10분 내에 교복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체육관에 가는 것 (그리고 체육 수업 직후 옷을 갈아입고 다음 수업을 듣는 것)은 손 기능이 좋지 않은 내게 고역이 아닐 수 없었으나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매해 체육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린 뒤 어떻게든 내 손으로 체육복을 갈아입고 늦게라도 체육관에 갔고, 갈아입느라고 놓친 설명은 친구들에게 부탁해서라도 다시 들었다. 실기 수행평가의 경우 그 해에 어떤 체육 선생님께 수업을 받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랐는데, 내 사정을 감안해 조금 다른 채점 기준을 적용해 주시는 분도 계셨고 다른 친구들과 동일한 채점 기준으로 실기를 보(고 낙제점을 받)는 일도 있었다. 솔직히 운동 신경이 좋지 않아서 어떤 기준이 적용되든 실기를 잘 보지는 못했다. 아마 체육 점수를 실기로만 매겼다면 나는 단언컨대 만년 꼴찌를 달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체육에서 아예 손을 놓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실기에서 망한 점수를 필기 평가에서 채워서 최종 성적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였는지 적어도 중학교에서는 또래 친구들에게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게 특혜도 아니고, 왜 쟤는 체육에서 맨날 봐주냐'라는 식의 볼멘소리를 듣는 일은 없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똑같이 참여했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내 장애를 가지고 제멋대로 나를 판단하던 사람들 덕택에(?) 오히려 그 편견을 깨고자 끈질기게 나의 자리에서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나는 장애인이니까 힘든 건 안 해도 돼'라는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내가 먼저 자기합리화를 해 버리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 같았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 어려워 보이는 일들도 맨땅에 해딩하듯 시도하면서 천천히 내 방식대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장애로 인한 신체적 한계는 점차 '나와 세상의 편입견 간의 싸움'에서 '나와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끈질김은 내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좌절한 후에도 금방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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