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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슬 Aug 23. 2022

소통

나는 평범하지 않지만, 알려주는 건 잘하지

"어, 저기 외계인이다!"

"야, 로봇이야, 로봇!"


초등학교 입학 첫날, 워커 (휠체어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재활용 보조기구, 밑에 있는 사진에서 내가 짚고 있는 기구가 워커다)를 짚고 교실을 찾고 있던 내게 느닷없이 외계인, 로봇이라는 멸칭이 날아들었다. 그 복도에는 나와 그 아이들밖에 없었으니, 나를 지칭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워커는 특성상 바퀴가 바닥과 마찰하면서 끽끽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데, 워커 자체를 처음 본 친구들이 아무 말이나(?) 뱉은 것.


하지만 그 당시의 이한슬은 상당히 패기 넘치는 꼬마였고, 나는 오히려 보란 듯 워커를 그 아이들 쪽으로 밀었다. "야, 나는 외계인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거든? 너네랑 똑같은 사람이야. 내 이름은 이한슬이고, 이건 내 발이 되어 주는 워커야. 앞으로 나 복도에서 보면 한슬이라고 불러."


이 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몇 시간만에 알아차린 일이지만, 이 친구들은 나와 같은 반에 배정된 또래들이었다. 아직 순수한 초1들이었어서 그랬던 건지, 이후에 이 친구들은 이른 아침, 복도에서 내 워커 소리만 들려도 먼저 교실 문을 박차고 나와서 나에게 인사해 주는 아이들이 되었다.



정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당찬 아이는 아니었다. 세 살 때 장애 판정을 받은 이후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데다, 몸이 약해 잔병치레만 했다 하면 입원하기 일쑤였다. 사실상 병원이 내 집이었고 집이 곧 병원이었으며, 치료사 선생님들의 이름을 외우면서 병실에서의 시간을 때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죄다 어딘가 아프거나 휠체어를 타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몸이 불편한 것이라 여기며 자랐다. 굳이 나의 다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일도 없었다.


그러던 이한슬이 병원 너머의 세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바야흐로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여섯 살.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어린이집이란 혼란 그 자체였다. 분명 나와 동갑인 친구들이라는데, 이 친구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린이집 안을 마구 뛰어다니며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나는 어린이집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 시기에 네발기기도 겨우 하는 수준으로 몸을 가누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 눈에도 내가 동갑으로 보일 리 만무했고, 아이들은 툭하면 나를 동생 취급하곤 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친구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저 아이들은 뛰어 다니는데 왜 나는 마음대로 내 몸을 쓸 수조차 없지? 그날로 나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울면서 어머니에게 왜 내 몸이 이렇게 이상하냐고 따졌다. 참고로 이건 내가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나인데, 나중에 듣기로는 어머니께서는 내가 중학교 1학년쯤, 사춘기가 오면 이 질문을 할 것이라 예상하셨다고 한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물어봐서 놀라셨다고... 어쨌거나 이 날 나는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장애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부로 어린이집 친구들이나 같은 아파트 이웃 등등, 만나는 사람이 내 장애를 가지고 어린애 취급을 할 때마다 당차게 내 다름을 소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의 습관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서,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마다 먼저 장애에 대해 밝히는 편이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받곤 했던 시선들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악의적이라기보다는 무지에서 나오는 반응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나의 장애에 대해 소통해야 한다고 느낀다. 좋든 싫든 간에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면 나의 장애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들도 알고 있어야 하고, 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서로를 더 잘 배려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장 지인들과 만날 때도 예외는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간만에 2년 간 국어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을 뵙기로 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신경을 쓴 것은 '휠체어로 다니기에 편할 만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날 나는 김포공항 롯데몰에서 선생님과 단둘이 데이트를 했는데, 보통 만남의 장소는 이런 백화점이나 실내 쇼핑몰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어디를 방문하든 계단이나 턱이 없어 휠체어로 오가는 데에 문제가 없고, 장애인 화장실도 각 층마다 있으며,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장애인 화장실이 없는 건물에 가게 되면 일부러 화장실에 갈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물을 일체 마시지 않는 편인데, 이런 일이 잦아지면 방광염도 올 수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습관성으로 참게 되기 때문.)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의 종류도 그나마 다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상대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면, 이렇게 만나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당황하거나 서로에게 미안해지지 않았을까. 


가끔 유튜브에서 나와 비슷한 뇌병변 장애를 가진 유튜버 분의 영상을 즐겨 본다. 하루는 해당 유튜버 분이 본인 채널이 아닌 한 공영 방송에서 장애인의 연애를 소재로 이야기하시는 영상을 보게 됐는데, 코로나 시국에 대학교에서 비대면으로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지만 차마 상대에게 장애 여부를 밝힐 수 없어 만남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당사자 분은 장애 여부를 밝히면서 '나 휠체어 타는데 괜찮아?' 라고 묻는 일이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허락 내지는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아 꺼려지셨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미리 밝히는 것이 오히려 상대에게도 예의라고 생각한다. 이건 상대방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네 마네 하는 문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을 만나려면 알아야 하는 정보다. 더군다나 연애를 위한 소개팅이라면 앞으로도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맞춰나가야 할 텐데, 그럼 나의 장애는 상대방이 더욱 더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 아닌가? 


결국 나의 장애는 나의 소통 능력을 키워 주었다. 어디에서 누군가를 만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해질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는 것, 그게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분명 나는 평범하지 않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이 사회에서 평범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오늘도 나의 장애를 알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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