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슬 Sep 07. 2022

책임감

숫자를 통해 만들어 나간 길들

'최초'.

내가 여태껏 다닌 학교들에서 그림자처럼 늘상 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물론 곧 입학하게 될 대학에서는 내가 더 이상 최초의 장애 학생이 아니지만, 적어도 초, 중, 고등학교 12년간 나는 교내에서 나를 제외한 휠체어 타는 학생을 본 기억이 없다. 가끔 다리를 다쳐 일시적으로 수동 휠체어 신세를 지는 친구들은 있었어도, 그 아이들은 부상이 낫자마자 다시 멀쩡히 걸어다니곤 했다. 나의 휠체어 덕분에, 나는 어딜 가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끄는 존재였다. 처음에는 이런 시선들이 마냥 싫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모두가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나에게 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시선들에 점차 무뎌졌고, 오히려 그 호기심들로부터 나오는 관심을 새로운 방향에서 이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내 중/고등학교 시절 내 장애로부터 책임감을 배웠다.


전교의 유일한 장애 학생으로 살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사람들이 의외로 나의 학업 능력에 대해 상당히 낮은 초반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입학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만 다닐 수 있는 중,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입학 시험을 응시하러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날 느꼈던 묘한 감정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본격적인 시험을 치르기 전 모든 응시자 및 응시자들의 부모님들이 한 방에서 옹기종기 대기하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순간에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나에게로 쏠렸다. 마치 '쟤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왔나' 싶은 눈빛들이 대다수였고, 방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참고로 우리 가족이 들어온 이후에도 몇몇 응시자 가족들이 뒤이어 대기실을 찾았지만, 내가 들어왔을 때처럼 모두가 빤히 그들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내가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학교였던 만큼 최선을 다해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감사하게도 합격이었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당당하게 입학한 후에도,  떨떠름한 반응은 똑같았다. 나를 담당하신 선생님들이야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 주셨지만, 대부분 교정에 처음으로 등장한 휠체어를 보며 신기해하거나    떠서 '어떻게  학교에 왔느냐' 묻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력으로  학교에 들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들에게 '장애인'  이상  이하도 아닌  싶었다. 내가 이런 시각을 바꾸기 위해   있는 일은 학업에 매진하는 , 그리고 결과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는 것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기회는 학년말이었다.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끝날 때가 되면 (코로나 이전에) 전교생을 대강당에 모아 놓고 학년별로 과목 최우수상을 수여하는 전통(?)이 있다. 최대한 많은 학생들에게 수상의 기회를 주려고 하지만, 간혹 여러 과목의 최우수상을 한 번에 휩쓰는 괴물 선배님들도 계셨다. 이런 선배님들을 보고 자란 병아리 신입생은 곧 '나도 모든 과목에서 1등해서 상 받아야지'라는 다짐을 했고, 내 로망은 이듬해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 당시의 어린 나에게는 성적표에 찍히는 숫자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장애와 상관없이 어지간한 과목에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걸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성적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남들이 인정해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아무도 나를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매 해 적어도 3개 이상의 과목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점차 나의 이름을 들었을 때 '장애인'보다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실제로 학교에 새로 오신 선생님들께서 나에게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라고 먼저 여쭤보신 적도 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숫자와 결과에 유독 집착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나의 존재를 증명해 내고자 하는 의지도 한 몫을 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최초'의 장애 학생이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이 학교에 들어오려면 입학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학업에 매진하게 했다. 나를 학생으로 선발했는데 막상 내가 학교에서 내게 갖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나중에 또 다른 장애 학생이 우리 학교의 문을 두드렸을 때 훌륭한 개인 능력치와 상관없이 비장애인 지원자가 선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내가 정말 잘해야 우리 학교에 더 많은 장애인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불안이 엄습했다. 실제로 나중에 입학 시험 당시 면접관이셨던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나를 합격시키기까지 모든 선생님들께서 전체 회의를 하셨다고 한다. 학교 측에서도 장애 학생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입학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내게 합격 통보를 하고 나서는, 나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에 대해 또 다시 전체 회의를 하셨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는 (아무도 내게 시키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나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어쩌면 더 이를 악물고 죽어라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이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이 학교 역시 장애 학생을 받아본 적이 전무한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해당 학교에 재학한 2년 동안, 학교에 장애인 화장실들이 층별로 생겼다. 재활병원에서 상당히 가까운 학교였던 점도 한 몫을 했는데, 장애인 화장실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활 병원에 함께 다니던 또래 친구들과 동생들이 줄줄이 해당 초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전학을 왔다. (참고로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시 모교를 방문해 보니, 이제는 지하에 있었던 과학실도 엘리베이터로 갈 수 있게끔 연결되어 있었다!) 장애 학생들의 수가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특수반도 개설되었다. 나는 해당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예쁨을 받는 학생이었고, 글쓰고 토론하는 걸 좋아해 관련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서 입상하는 일도 많았다. 물론 선생님들께서 비단 내 입상 결과 때문에만 나를 아껴 주시지는 않으셨겠지만, 내가 이 학교에 재학한 후로 장애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좋아진 것 같아 뿌듯했었다.


아직 내가 대학 생활을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 최초의 장애 학생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실력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의 인식은 '장애가 있는 대학 동기'에만 머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장애인으로 살면서 그나마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먼저 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신 장애인 분들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의 부모님 세대 때는 아예 학교에서 장애 학생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종종 내가 좋은 시대를 타고났다고 얘기하신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나는 앞서 다른 장애인 분들이 그러셨듯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신체적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보란듯이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걸어간 길을 걷고자 하는 다른 장애인 분들이 조금은 덜 고생하면서 이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앞으로의 대학 생활도, 또 대학 이후에도 하루하루 그 날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 작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끈질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