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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lli Nov 20. 2022

티베트 라싸역에서 눈물을 흘린 이유

수년 전 운명적으로 티베트를 만났고 당시 라싸, 시가체, 간체를 거쳐 윈난성 리장에서 여행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10년째 리장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살며, 여행하며 만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감정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글은 그 시작이 되었던 티베트 여행기입니다.




베이징에서 라싸까지 48시간 동안 달리던 기차에서 내려서 마침내 땅을 밟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도착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는 아니었다. 라싸역의 모습 중 하나가 가슴 깊은 곳을 때렸다. 


칭장 열차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청두에서 항공편으로 라싸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꼭 기차를 타고 가고 싶었다. 라싸에 도착하는 과정을 내 눈과 마음에 천천히 담고 싶기도 했고, 겁도 없고 무모해서 중국 정부에 여행 일정을 신고하면서 다니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컸다. 


(혹여라도 이 글을 보고 따라 하시는 분들은 절대 없기를 바랍니다. 현재 저는 외국에 거주하든, 여행하든 반드시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며,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당시 내 중국어 실력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의 수준이랄까, 하여간 이런 유의 위험천만한 도둑 여행을 감행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겼을 때 뭔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티베트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참을 기다렸고 이제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출발했고,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에서 표를 구해서 기차에 올랐다. 


베이징에서 출발한 열차가 거얼무(格尔木) 지역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정말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끝도 없이 펼쳐진 고원 끝에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생명이라는 건 마치 이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우리밖에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무인구 한복판을 달리는 듯한 기분, 당시엔 영화 '설국 열차'가 개봉하기 전이었는데, 사방을 둘러싼 흰 눈과 빙하만 없다 뿐이지 마치 그와 비슷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설국 열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나는 침대와 테이블까지 있는 좌석을 이용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모든 좌석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 기차 대부분의 승객은 춘절을 맞아 고향을 찾아가는 농민공들이었고, 그들의 급여를 생각해보면 비싼 침대칸을 살 경제적 조건이 허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고 딱딱한 90도 등받이 의자에 48시간을 앉아서 가는 잉워(硬卧) 칸이 가장 붐볐다.


식당칸에 가려고 이동하던 중 처음으로 잉워칸을 열었다가 나는 다시 문을 닫을뻔했다. 바닥은 쓰레기가 몇 층으로 쌓여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었고 그 쓰레기들 사이에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아이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걱정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친해진 한 친구는 자신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며, 고향에 간다며 밝게 웃었다. 


밖에서 달리는 열차를 바라본다면 그저 한 량의 기차일 테지만 이 안에는 다양한 이유로 라싸를 향하는 사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좌석 등급에 따라 비슷한 색깔로 나뉘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열차가 달리는 길은 황량하기 그지없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다. 설산과 야크는 너무 흔해서 이제 시들해질 무렵 갑자기 눈부시게 파란 호수가 떡하니 나타난다. 머리맡에서 갑자기 ‘췩~’하고 가스가 살포되기도 했는데 놀라서 두리번거리면 창문 밖으로 해발 고도 4,594m 이런 표지판이 나타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 본 인공 산소의 맛. 지금은 어느 마트에서나 생수를 팔듯이 산소통을 파는 동네에 살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산소를 마신다는 것이 생소했다. 기차는 이렇게 승객들에게 산소를 공급하면서 계속 달렸다. 



함께 갔던 동생이 있었고 우리는 서로 약속했다. 허가증 없이 들어온 외국인이라는 것을 절대 티 내면 안 된다, 제복 입은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눈을 피해야 한다 등의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하지만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우리의 긴장은 풀어지고 이 기차 안에 한국인 두 명이 타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고백할걸.


승객, 승무원 모두 우리에게 크고 작은 호의를 베풀기 시작했다. 옆 칸에 앉은 언니의 남편은 마침 이 기차의 승무원이라고 했다. 잡아가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오히려 산소 호흡기를 무료로 갖다 주면서 사용하라고 하고, 식당칸에서 직접 만들었다며 따끈따끈한 만두를 나눠주기도 했다. 




플랫폼을 나와서 바라본 라싸역은 너무 넓었다. 서울역의 몇 배쯤 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광장을 가로지러 걸어가다가 지칠뻔했고 해발 고도 때문인지 걷기도 힘들지만 눈도 많이 시렸다. 눈을 몇 번 껌벅이다가 나도 모르게 또르륵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는데 그제야 고도 때문에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일제 강점기의 모습과 대학 시절 (당시에는) 몰래 읽어야 했던 책들 속에서 만난 광주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거의 100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듯한 군인들, 총을 들고 서 있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현지인들, 사진 촬영 금지 표지판


티베트를 여행하면서 여러 번 마음으로 울었던 것 같다.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에 도착한 티베트 사람들을 만났을 때, 현지인들의 호의에 감동했을 때, 혹은 이유 없이.

많이 웃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어느 여정보다 충만했던 시간이었고, 그래서 결국 나는 티베트 바로 아래 동네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계속)


(이 글은 특정 지역에 대한 제 견해를 담은 글이 아니며 당시의 감상을 쓴 여행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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