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가 쓰는 요즘 MZ세대에 관한 글
난 나중을 기대하기 힘들수록 지금의 만족스러움에 기대게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었을 때에는 딱히 그런 생각이 안 들었었는데, 어딘가 대조적인 분위기의 한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예전 어릴 적 내가 당연시했던 부분들과 함께 부각되어 내 생각의 귀퉁이를 차지했다.
나중을 기대하기 힘들수록 지금 당장 만족스러울 수 있는 것들에 신경 쓴다.
이렇게 보면 “난 소변이 마려울 때 화장실을 가게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뻔한 대목 같지만, 이에 연결되는 나만의 유추가 어느 정도 있다. 아직 절반도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서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진리라고 믿게 된 것들 중 하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 마음이다.
최근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주지사가 공식적으로 노숙인 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부가 이 사태를 공식적으로 문제라고 인식하기 전부터 로스앤젤레스의 주거문제는 여러 미디어를 통하여 제기되어 왔었다. 나는 그 많은 미디어들 중 가장 접하기 쉬웠던 다큐멘터리를 통해 상황을 어느 정도 심도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다큐의 전체적인 구성은 한 구역에 노숙하는 여러 명의 노숙인들에게 어쩌다 집을 잃고 거리에서 삶을 보내게 되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그들의 가장 솔직한 삶을 비추기 위해 노숙인들의 하루를 가능한 한 가까이, 세밀하게 보여준다.
심각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던 나는 다큐 중반, 한 여성이 카메라 크루를 자신이 노숙하고 있는 장소로 안내하는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점을 품었다. 공원 나무 그늘 아래에 쳐진 작은 텐트 곁에는 그녀의 반려견이 있었다. 배고프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추우면 함께 붙어 온기를 공유하며 자는, 동거자와 비슷한 역할의 반려견이 있었다.
근데, 왜?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바쁠 텐데, 어째서 반려견까지 붙들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지?
일단 그 상황에서 반려견은 그녀에게 필수적인 삶의 요소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저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 말 그대로 인생의 반려를 얻기 위해 함께 하는 걸까? 이런 사소한 생각이 내린 씨앗의 싹에 적당한 사소한 답이었다.
하지만 생각의 줄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 멈추기엔 수수께끼의 단서를 전부 찾아놓고 서로 연결하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줄기를 놔둔 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홀로 그 의문을 품은 채 그저 내 삶을 살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것들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평범해 보였던 풍경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마 매듭짓지 못했던 생각이 무의식에 스며든 나머지 가장 흔히 접하는 주변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단서를 찾도록 날 인도한 게 아닌가 싶다. 잠시 시들하던 생각의 줄기가 몇 개월 전, MZ세대의 가치관에 대해 다룬 책을 읽었던 기억을 만나면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MZ세대가 기성세대의 젊었을 시절과 가장 다른 점은 대부분의 기성세대가 일군 취직 - 연애 - 결혼 - 가정 순의 삶의 절차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개개인의 취향을 더 중요시하면서 사회의 전반적인 방향이 개인의 취향, 이른바 “개취존중" 성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크게 변하면서 그에 따라 소비문화와 취업시장 또한 변화를 보였다. ‘소확행’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한 직장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일하는 n잡러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으며, 대화 속 말풍선에는 ‘1인가구', ‘비혼주의', ‘욜로(YOLO)’같은 단어들이 자주 오고간다. 나중에 연애할 때 쓸 돈, 나중에 신혼집 구할 때 쓸 돈, 나중에 살림할 때 필요할 돈 등등 “나중에"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히 줄어들고, “지금” 내가 무엇에 투자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가 최우선인 삶들이 사회를 구성한다.
하지만, 왜? 왜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 거지?
그에 대한 나만의 답이 길었던 의문의 열쇠가 되어주었다.
한국의 MZ세대들은 나중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지금의 만족스러움에 투자한다.
앞서 말했듯, 수많은 명목 하에 모으는 자금들과 그 목표들을 위해 보내는 시간들은 모두 ‘나중'을 바라보고 견디는 건데, 그 끝에 남는 것이 티끌에서 조금 더 큰 티끌과 다시 삶의 굴레로 돌아가 또 다른 ‘나중'을 바라보며 다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의무라면, 그들이 ‘지금' 노력하는 고된 시간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튜버 최재천님 (이분을 이렇게 소개하니 진짜 이상하다.) 께서 한국의 출산율에 대해 다루는 영상이 있다. 영상에서 최재천님은 “한국에서 애 낳으면 바보"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는다. 왜? 계산이 맞지 않으니까. 너무 단순한 이유에서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인생의 주요 가치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에서 개개인의 취향을 충족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만족스러운 삶 = 지금 내가 행복한 삶'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주된 이유는 그들의 삶에서 '나중'은 그다지 믿을만한 도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나중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끔 고급과 명품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면서 (한국인들은 전 세계 명품 브랜드들의 가장 믿는 도끼들이다.), 그리고 초라한 골목길에 대조적으로 보란듯이 주차되어 있는 외제차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만의 ‘나중에'가 믿을만한 게 못 되어서 이렇게 지금 당장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곳들에 투자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괜히 한국이 전 세계 명품 브랜드 소비국 상위권에 위치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중은커녕 당장 오늘 저녁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채 삶의 주도권을 세상에 빼앗긴 다큐 속 노숙인들도, 겉으로는 독특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삶을 살아가며 인생을 만끽하는듯한 MZ세대들도, 사실 모두가 비슷한 이유에서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취향을 우선시하는 삶과 쾌락에 취해 살아가는 삶을 구분짓는 선이 애매모호하다고 생각되지만, 워낙 이례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MZ세대가 적응하는 과정의 과도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MZ세대 전체를 싸잡아서 그들 모두가 흥청망청 인생을 흘려보내는 하루살이들이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들이 있기에 그간 당연시 여겨지던 틀에 박힌 폐습들과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을 산다'가 '쾌락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게 좋은 삶'으로 변질시켜 이해해 버리는, 잘못된 가치관에 기대어 살아가는 동년배 청춘들이 존재한다. 이들에게 '나중'은 없다. 그래서 잃을 게 없다. '지금' 만족스러우면 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나 역시도 '지금'과 '나중' 사이 애매한 위치에서 시간의 흐름에 내 운명을 맡겨놓은 상태이다. 나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명분으로 내리는 잘못된 결정은 없는지, 혹은 믿을만한 ‘나중에'를 생각한답시고 나를 챙겨야 할 때 외면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고 있는지.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함께 고민해 보면 취향과 삶의 적절한 균형이 잡히면서 그에 대한 기준 또한 선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이러한 기준이 분명할수록 우리 사회도 아주 조금씩 더 건전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