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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환 Feb 16. 2023

따릉이를 타고 서울을 활보하면 좋은 점들

따릉러들이여, 일어나라!

1. 교통비가 절감된다… 식의 뻔한 순위 나열은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뻔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교통비가 절감된다는 건 알고 있다.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만 따릉이 이용 시간 1,400분, 주행 거리 약 250km의 이력을 보유한 단기 프로페셔널 따릉러로써 그간 열심히 서울을 활개치고 다니면서 느낀 점을 오직 나만의 갬성으로 담아보겠다.


장점 1. 연인 관계 증진.  


자전거와 연인 관계 증진은 생각보다 꽤나 일리 있는 조합이다. 따릉이를 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좁은 인도로 가야 할 때가 있다. 도로가 너무 좁거나, 자전거 우선도로가 없다던가 (자전거 우선도로에 대해서는 장점 2에서 이야기한다.). 그래도 이름이 따릉이인 만큼 자전거 벨이 달려있기에 안전하게, 무리하지 않고 손쉽게 내 갈길을 잘 찾아갈 수 있다. 재밌는 건 벨을 울리는 순간이다. 행인들은 저 멀리서 질주해 오며 우레(?) 같은 따릉 소리를 내는 나를 듣고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나는 안전을 위해서 따릉 소리를 정말 자주, 우렁차게 내려고 하는데, 이게 위협적으로 들렸는지는 몰라도 극적인 순간이 연출될 때가 가끔 있다. 전혀 그러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도. 특히 연인들. 남자든 여자든,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팔을 잡아끌고, 손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감싸주기도 하고, 젠틀하게 상대방을 안쪽으로 밀어주기도 한다. 따릉이를 타고 다닌 지 며칠 안 됐을 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별 신경을 안 쓰다가 비슷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연출이 되다 보니 이에 대해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접근으로 인해 연인들은 서로 접촉할 명분이 생기게 된다. 또한 상대방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자신이 그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위해주는지 직접 몸으로 표현할 기회를, 혹은 빌미를 제공하는 셈인 것이다. 일상 속 찰나의 순간에 들던 가벼운 생각들이 쌓여 무게 있는 자부심으로 변하게 되고, 나로 인해 누군가의 관계가 일 퍼센트라도 나아졌다고 생각하니 조금 뿌듯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내가 되게 어이없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매번 쿡쿡 웃으며 페달을 밟았었다. 아, 재미있다고 해서 일부러 길을 걸어가는 그대들을 위협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니 안심하고 가던 길 안전히 잘 가시길 바란다.


장점 2. 차도를 질주하는 짜릿함.

  

고속도로에 고속버스 전용 차선이 있는 것처럼 집 주변에도 무슨무슨 전용 차선이라며 파란색이나 빨간색으로 차선을 죽죽 그어놓은 도로를 한 번씩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운전하는 서울 시민이라면 거의 모든 번화가로 통하는 길의 우측 맨 끝 차선에 “자전거 우선 도로"라고 쓰인 하얗고 두꺼운 노면표시를 적어도 한 번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없다면 전방주시 상태가 매우 불량하다는 뜻이니 안전 운전할 수 있도록 하자). 찾기 쉬운 생활법령정보에 의하면, 차가 적당히 다니는 서울 도로의 맨 오른쪽은 자전거와 자동차가 서로 사이좋게 다닐 수 있도록 지정해 놓는 도로라고 한다. 내가 주로 다니는 길은 홍대 - 신촌 - 아현 - 충정로 - 서대문 - 종로 구간이다. 홍대와 종로를 따릉이를 타고 왔다 갔다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일단 다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애매한 경사의 오르막이 계속되는 서울의 죄악스러운 지형, 그리고 매번 페달질하느라 고통받는 두 허벅지에서 펑펑 흐르는 눈물의 매운맛을. 신촌 - 이대 구간이 이런 경향이 정말 심한데, 여기는 게다가 보행자도 많아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간혹 차량이 (특히 버스들…) 지나치게 오른쪽 차선에 달라붙은 채 줄줄이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라면 자전거 우선도로는 무슨, 보도에서도 대우받지 못하는, 보행 훼방꾼으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따릉이를 타고 다니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르막에 있다. 제 아무리 오르막이래도 결국 최고점이 있기 마련. 그 정점 뒤에는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광활한 내리막이 날 기다리고 있다. 뒤틀리는 허벅지로 몰리다 못해 부글거리던 피가 잔뜩 긴장된 근육 사이에 끼어 낑낑대다가 오르막길의 끝에 다다라서 그 긴장을 놓는 순간, 폭포수처럼 혈관을 따라 다리 구석구석을 누빈다. 따뜻하고 얼얼한 그 움직임을 인지하며 난 페달을 밟고 일어선다. 서커스의 곡예사처럼 있는 힘껏 다리를 쭉 펴고 차근차근 강해지는 가속도를 바람의 세기를 통해 확인한다.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여야 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난 그대로 내리막길에 날 맡긴다. 갑갑한 빌딩들 사이 자유롭게 질주하는 존재가 되는 기분은 평범한 모래사장 같은 일상 속 홀로 반짝이는 진주와도 같은 순간이다. 낮에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퇴근시간이 훌쩍 지난 저녁이 가장 좋다. 도로 양 옆 가게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자전거 우선도로 위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되어주고, 드문드문 인도 위에서 버스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마치 레드카펫이 펼쳐진 시상식에 입장하는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망상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울은 저녁에 그 매력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생각한다. 밝게 빛나는 네온사인 아래 뒤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멋들어진 외관을 자랑하는 행인들이 길 위를 가득 메우면 그제야 ‘아, 서울이다' 싶달까. 일상 속 소소한 자유를 체험하고 싶다면 늦은 저녁, 오르막을 열심히 오른 뒤 쏜살같은 내리막을 경험해 보라. 여기서 오르막이라는 전제는 필수불가결하다.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아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점 3. 따릉러들끼리의 동질감. 


이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는데, 나와 비슷한 몰골(?)을 하고 따릉이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를 따스한 동질감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보통 나와 비슷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내 신뢰의 일정 부분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타인들 중 일부에 불과하더라도 그 짧은 순간만큼은 그들을 짧게나마 신뢰한다. 내가 그들에게 보내는 신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우선 따릉이를 이용한다는 건 돈을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일 확률이 크다. 따릉이의 최대 장점은 딱 1,000원의 투자로 한 시간 단위로 하루 내내 서울 구석구석에 위치한 따릉이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침 출근길에 따릉이를 30분간 대여하고 반납하면, 그날 남은 따릉이 이용 시간은 30분이 아닌 1시간으로 다시 초기화된다. 그 말인즉슨, 반납만 한 시간 이내에 한다면 그날 하루는 무한정 따릉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보기 힘들어진, 이게 바로 진정한 천 원의 행복이 아닐까. 이들은 또한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게 되어있다. 따릉이 이용자들은 대중교통의 편리함을 지불하고 건강과 탄소 절감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은 환경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중이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더욱 생동감 있게 전해지는 서울 시내의 움직임, 그리고 날마다 미세하게 변화하는 계절의 색깔을 피부로 직접 느끼고 싶어 하는 탐험가의 기질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성향을 가진 나와 낯선 따릉러들은 벌써 상당 부분에서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따릉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일상의 일부이고, 일상은 삶의 과정이니, 나와 서울의 따릉러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데도 삶의 부분적인 가치관을 함께 실천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나의 신뢰를 잠시 줄만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참고로 따릉이를 타고 있지 않더라도, 그리고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대여소 근처를 얼쩡거리지 않아도 따릉러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찾았다. 어느 날 열심히 따릉이를 타고 대여소에서 안전하게 내리는데, 엉덩이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섬뜩한 심정으로 바지를 더듬어보니 젖어있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운 심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윗옷 끝단으로 최대한 가리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을 건너자 내 바지와 똑같은 부위가 젖어있는 행인을 발견했다. 그는 눈치도 못 챈 듯 태연하게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이건 따릉이다!’하고 생각했다. 나와 이 사람의 바지에 몹쓸 짓을 한 범인이 따릉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가졌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이 그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따릉이 대여소는 야외에 위치한다. 또, 캐노피 같은 가림막이 없다 보니 비, 눈, 또는 이슬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로 새벽을 지새운다. 그러면서 하루 새 맺혔던 이슬이 안장에 스며들고, 따릉러들의 무게에 눌린 안장은 스펀지처럼 머금었던 새벽이슬을 뿜어내어 가여운 바지를 젖게 만든다는 논리다. 따라서 젖은 바지를 눈치채지 못하고 신호만 기다리던 그 또한 따릉러일 확률이 크다. 물론 다른 이유로 그의 바지가 젖어있었을 수도 있지만, 따릉이가 범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게 느껴진다. 이런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사소한 접점이 서울에 상경한 쓸쓸한 자취생의 동질감을 자극하는 순간이다.

   

쓰고 나니 굉장히 사적이면서도 쓸데없는 글을 쓴 것 같다. 하지만 쓸데없다는 게 실용성이 없다는 거지,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만에 하나 따릉이를 타고 다니다가 난데없이 도로변에 자전거를 세우고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어느 청년 따릉러를 발견한다면 반갑게 인사해 주길 바란다. 아마 나일 확률이 높을 것이고, 우린 서로 잘 맞는 사이일 확률 또한 높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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