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대학원 야간 수업을 마치고 세종으로 내려오는 길에 듣던 음악들이 지겨워져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게스트로는 7년 만에 컴백앨범을 낸 가수 김종서 씨가 출연하였다. 사실 김종서의 음악도 들어본 적이 없는터라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느끼는 그 고통과 고독의 순간들을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표현한 것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김종서 씨는 7년 만에 컴백한 앨범의 키워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단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 단어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한다. 누구나 알게 모르게 사랑을 해 봤고, 사랑을 받아보기도 했다. 연인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 일컫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을 사랑이라 하기도 한다. 일을 사랑한다 말하기도 하고, 물질을 사랑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랑의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는데, 이와 같이 사랑만큼 정체성이 모호한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알 수 없지만 좋은 느낌'을 사랑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도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내가 기분이 좋은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을 준 대상은 고스란히 사랑받는 대상이 되었다. 때로는 그 대상으로 인해 나에게 힘겨움이 와도 사랑하는 대상(나에게 좋은 기분을 주는 대상)이 준 힘겨움이기 때문에 그 역시 사랑의 범주 안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사랑은 어쩌면 좋은 느낌과 상반된 그 외의 감정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현시점,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희생'이다. 사랑하는데 왜 희생하느냐?라고 한다면, 사랑 자체가 곧 희생이기 때문이다. 희생이라고 하는 단어에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희생을 '자신이 손해 보는 것'쯤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만한 사랑 안에서만 희생이 가능하다. 희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에 성경구절을 언급하는 것을 지양하지만,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그 처음과 끝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힘"
쉽게 말하면 견디고 참는 것이 사랑이다.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도 같은 말을 다른 형태로 서술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어떤 좋은 점에 끌려 사랑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반드시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그 이후에 남은 감정들은 기대에 대한 실망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랑은 기술이기 때문에, 경험과 학습이 필요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고, 반복적으로 학습하며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을 만들어 타인을 강제하고, 그 모습과 어긋난 타인의 모습에 쉽게 분개한다.
그 분노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상대를 자신에게 맞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하여 이별을 선택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 자신에게 기쁨과 행복과 쾌락을 주는 모습만을 사랑하는 반쪽짜리 사랑일 뿐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사랑은 그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사랑함으로써 마침표를 찍게 된다.
때로는 즐겁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때로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의 모습에 대하여, 자신을 내려놓고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견딥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용기가 사랑인 것 같다.
상대에게 돋친 가시를 내가 끌어안음으로 살이 찢기고 피가 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위하여 안아주는 것이 희생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희생에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했으니 너도 나한테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해야 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고결한 희생이 바로 사랑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