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복도 끝에서 나를 멈춰 세운 잔광
회사에서의 둘쨰 날은 유난히 길었다.
시간이 늘어났다기보다, 흐름이 더디게 흘렀다.
일은 많지 않았고 대화도 거의 없었지만
어제 책상 아래서 본 흔들림이 머릿속에 걸려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 때마다 어제의 공기가 먼저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던 책상 아래
검은공간에서 빛의 잔광처럼 흔들리던
그 작고 간지러운 느낌이 오늘 하루를 따라다녔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아래를 흘끗 봤다.
어제의 그것은 없었다.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자리를 비운 느낌이었다.
책상 위 모니터는 정확한 사각형이었고
그 아래 공간은 또 다른 사각형이었다.
어제는 그 사각형 속에서
뭔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정지된 그림 같았다.
그 정적이 더 불편했다.
오후로 넘어갈 무렵,
팀장과 몇 줄 대화를 나눴다.
업무 설명은 간단했지만
말들이 귓바퀴를 지나가며 오래 남지 않았다.
단어들이 공기 중 흩어지는 느낌.
기억이 얇아지는 기분.
최근 며칠동안 이상하게 단기 기억이 자꾸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책상 아래가 다시 약하게 흔들렸다.
기척이라 하기엔 너무 조용했고
착각이라 하기엔 너무 명확했다.
무언가가 바닥과 공기를 갈랐고
그 갈라진 틈을 따라
아주 짧고 얇은 떨림이 지나갔다.
바람이 없다.
기계음도 없다.
그런데 움직임이 있었다.
모니터를 켜고 문서를 읽는척하면서 발끝으로 바닥을 문질렀다.
감각은 희미했다.
그러나 분명 있었다.
한 번 더,
바닥 아래로 작은 파동이 지나갔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숨을 들이쉬고 멈춘 것 처럼.
오후 세 시쯤 되었을 때
그 흔들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빛이 꺼진 것도 아니고 그늘이 움직인것도 아닌데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빈자리만 남았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짤벡 인사를 주고받고 사라졌다.
책상 위의 모니터가 꺼지고
창문에 어둠이 걸리면서
사무실이 커졌다.
낮에는 몰랐던 공간의 깊이가 드러나는 느낌.
가방을 메고 복도로 나왔다.
천장의 긴 LED등들이 바닥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빛은 하루정일 켜져 있었을 텐데
밤이 가까워지자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깜빡이는 듯했다.
복도 끝에서 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등 불량 같기도 했지만 규칙성이 없었다.
다시 보니 깜빡이는게 아니라 흐르는 것에 가까웠다.
물 위에 비친 빛이 바람에 흔들릴 때 생기는 작은 흔들림.
하지만 이 건물에는 물이 없다.
지하 주차장도 건조한 콘트리트다.
복도는 비어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스스로의 발소리가 낯설게 들릴 정도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복도는 멀고 빛의 흔들림은 더 멀었다.
그러나 분명히 있었고 내가 다가갈 수록 흔들림은 더 작아졌다.
복도 중간쯤에서 멈췄다.
공기가 묘하게 움직였다.
온도는 일정했지만 질감은 달랐다.
몇 시간 전 책상 아래에서 느꼈던 공기와 비슷한 감각.
바닥을 바라봤다.
깊은 회색 바닥 위로 조용한 금이 생긴 것처럼 한 줄기 흔들임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내쪽으로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누군가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인지, 마음속에 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흔들림이 사라졌다.
"안 가세요?"
뒤에서 누가 말했다.
같은날 입사를 했다던 옆 팀의 동기였다.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켰다.
나는 짧게 끄덕이고 따라갔다.
그러나 복도 끝은 여전히 눈에 들어왔다.
금이 갔다 사라진 바닥.
빛이 스쳤던 공간.
누군가 지나간 것 같은 기척.
그 모든 것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바닥의 그 기척이 다시 아주 미세하게 든들렸다.
누군가 내 시건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 다른 생각이 머리속에 스쳤다.
장소는 시간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계단 밑에 남아 있고,
어떤 기억은 복도에 남아 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흔적들이 어딘가에서 계속 움직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일도 그 흔적을 보게 될것이다.
그런 예감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용히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