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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과지성사 Dec 14. 2022

드뷔시, 라벨, 그리고 상페

예술과 프랑스   

  

최근 장 자끄 상페(Jean Jacques Sempe, 1932-2022)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덕분에 책꽂이에 꽂아놓고 미처 읽지 못하고 있던 <상페의 음악> 책을 꺼내서 읽어보게 되었다. 그의 미발표 그림들이 상당히 많아 언뜻 보면 일러스트 모음집 같다. 하지만 읽어보니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주로 그의 재능과 그가 사랑한 음악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었다.      


<상페의 음악>, 출판 미메시스


그가 사랑한 음악 장르는 주로 클래식과 재즈이다. 유튜브에는 이 책을 기반으로 한 상페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도 있다. 그가 사랑한 프랑스의 음악들을 들으며 책을 읽었더니,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이 프랑스처럼 느껴진다. 바게트, 크로와상과 와인 한 잔과 함께라면 흠뻑 프렌치 감성에 빠질 수 있다. 그 기분을 공유하고 싶어 ‘드뷔시, 라벨, 그리고 상페’라는 제목을 지어보았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Po8uXqodII3izUye3XphtBzIKUWlWLMj

 

어려서부터 아멜리에(Amelie Of Montmartre, 2001), 몽상가들(The Dreamers, 2005), 가장 따뜻한 색 블루(Blue Is The Warmest Color, 2015) 등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프랑스 영화들을 좋아했다. 자극적이거나, 천연덕스럽게 운명론적이거나. 마치 어른의 세계에 입성하는 순간 나도 이토록 강렬하게 감정에 충실한, 때로 동화 같은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판타지였다. 어떤 이야기든 아름답게 묘사하는 데엔 프랑스 영화가 최고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어는 또 어찌 그토록 유려하고 매끄러울 수 있을까? 언어학적으로는 모음의 종류가 풍부하고 연쇄적인 발음이 많아서 그렇게 들린다고 한다. 나도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지만 아직 초보라서 연음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글로는 읽을 수 있지만 귀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한 어절인지 잘 안 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연결성’은 프랑스 문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프랑스의 국기

자유저항!     


본격적으로 프랑스 예술의 대표적인 사조인 ‘인상주의’ 프랑스 음악에 대해 살펴보자. 왜 프랑스의 음악은 독일과 다르게 발전했을까? 음악을 전공하며 프랑스 작곡가들을 연주하고 공부할 기회도 많았지만, 사실 나의 INTJ 성격은 형식적이고 구조적이며 진중한 분위기의 독일 전통의 음악과 더 잘 어울렸다. 오히려 유연하게 연결되는 프랑스의 음악 특징은 내게 가장 부족한 면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갈망하게 되는 것 같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사조는 독일 중심의 음악전통을 거부하며 생겨난 것이다. 역사를 알면 음악도 더 잘 보이는데, 자유를 추구하는 프랑스의 민족적 색채가 음악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파리 혁명 이후 프랑스의 음악 특징은 더욱 극대화되었다고 한다. 보다 가볍고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하는 점에서 반독일주의, 반낭만주의를 표방했다.     

 

모네, 해돋이 (출처 https://blog.naver.com/pgodot/222661277393)


이는 인상주의 미술사조와 연결지어 연상해보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의 유명한 그림을 떠올려보면, 고정된 상태의 정확하고 정적인 사물의 묘사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적인 색채를 포착하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인상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때문에 색채, 색조, 질감 자체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되었다.    

  

비슷하게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은 어떤 강한 감정이나 기승전결의 논리적 이야기를 표현하기보단 암시와 분위기에 더 초점을 두는 것이다. 주로 빛, 바람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순간적인 인상을 잡아내기에 좋은 재료였다. 다이내믹이 분명하고 강하다기보단 울림의 매혹적인 음향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순간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도록 곡의 길이가 짧아지기도 한다.      


음악 이론에 관심 있는 독자 분들을 위해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전통적 조성을 붕괴하며 신비롭고 모호한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특이한 화성적 특징들이 보인다. 선율이나 화성을 분위기 표현의 수단으로 보았으며, 뚜렷한 선과 형태보다는 음의 색채감을 더욱 추구했다. 선율을 해체하고 음향의 뭉뚱그려진 모호한 효과를 강조한다. 기존의 장·단조를 벗어나 교회선법, 5음 음계, 온음 음계, 반음계적 화음 등이 자주 사용되었다.      

온음음계의 설명 (출처 두산백과)


드뷔시와 라벨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는 <기쁨의 섬>, <목신의 오후 전주곡>, <아라베스크>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곡가이다. 개인적으론 드뷔시의 <기쁨의 섬>이 ‘환희’를 묘사하는 프랑스적 어법으로 최고의 경지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이라면 같은 주제로 작곡해도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9번 교향곡 4악장 같은 작품이 된다. 베토벤의 환희는 구조적으로 그 단계까지 이르는 순서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느낌이라면, 드뷔시의 환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 그 자체의 생생한 흐름 속에 푹 빠져있다. 이성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정에 다이렉트로 솔직하게 노출시키는 것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취향인지는 각자 다르다.      


일산 어딘가에서 찍었던 달빛 사진


기왕 베토벤과 비교한 김에 베토벤의 <월광>소나타의 1악장과 드뷔시의 달빛도 비교해 보자. 둘 다 기분이 차분해지는 것은 같다. 다만 엄숙한 셋잇단음표의 행렬로 규칙적이고 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독일식 월광이다. 반면에 리듬이 자유롭고 선율의 진행도 불규칙적으로 점프하거나 순식간에 하락하는 건 프랑스식 달빛이다. 묘사의 느낌도 조금 다른데, 베토벤의 월광은 엄숙하다면 드뷔시의 달빛은 따스하게 느껴진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취향인지는 모두 다르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물의 유희>, <거울> 등이 대표작이다. 내게 드뷔시는 보드랍고 파스텔 톤이라면 라벨은 조금 더 선명하고 원색적이다. 라벨은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에 살짝 걸쳐 있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드뷔시보다 라벨이 형식면에서 더욱 고전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그는 감각적 환상을 강조하는 인상주의가 자칫 너무 형식이 없는 방향으로 갈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뚜렷한 윤곽, 명확한 리듬, 모음곡과 소나티네 등 고전 양식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드뷔시보다 강렬하고 선명한 감정의 폭발을 자주 느낄 수 있다. 




드뷔시와 라벨을 바라본 상페의 시선     

상페의 그림 (출처 Pinterest)
상페의 그림 (출처 Conde Nast Store)


상페에게 가장 위대한 음악가 3인은 드뷔시, 라벨, 듀크 엘링턴이었다. 수많은 음악인들 중 꼽은 세 명에 프랑스인인 드뷔시와 라벨이 들어있는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나도 어딘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를 꼽으라는 질문을 받으면 윤이상, 진은숙을 이야기해야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상페는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정말 사랑하고 조예가 깊은 예술가였다. 그는 80살이 넘어서 한 인터뷰에서 사실 화가가 아니라 늘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프랑스인 예술가이자 음악 애호가인 그는 자국의 대표 작곡가인 드뷔시와 라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가 음악에 대한 사랑을 구구절절 고백하고 있는 책 <상페의 음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그는 드뷔시는 프랑스 음악의 정수라고 보았다. 음 두 개만 갖고도 달빛을 만든 작곡가라고 극찬하고 있다. 또한 라벨의 음악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입부에선 본격적으로 뭔가가 시작되려나 보다는 기분이 드는데, 갑자기 음악적 쓰나미가 일어나는 음악이다. 물결이 점점 높아져서 에펠탑만큼 치솟으면, 당신은 그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아주 굉장한 것이다. 이렇게 청중들을 구름으로 데려가는 음악가가 많지 않다.”


에펠탑만큼 물결이 치솟는다고? (출처 EASY & BOOKS)


이 문장은 라벨의 대표적인 작품 <라 발스>를 떠올려보면 무슨 느낌인지 정확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의 쓰나미의 이미지를 또 독일과 비교해 보자. 상페가 말하는 쓰나미는 베토벤처럼 건축적으로 쌓아나가는 태풍, 템페스트가 아니다. 그 느낌이 다른 것을 독자 여러분도 느껴보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하이든이나 바흐의 왈츠와 비교해서 <라 발스>가 어떻게 다른 왈츠인지 들어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아무튼 상페는 드뷔시와 라벨을 정말 사랑했다. 그는 드뷔시와 라벨이 자신의 집으로 만찬에 초대되어 놀러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한다. 아예 그런 꿈을 더 자주 꾸기 위해서 잠들기 전 그 생각만을 집중해서 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하니 진정한 오타쿠가 따로 없다. 혹 그나 프랑스인이라서 프랑스 작곡가는 다 좋아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또 그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또 다른 작곡가인 에릭 사티(E. Satie, 1866-1925)의 경우 불호했던 모양이다. 그의 꿈속에 사티는 놀러와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라벨을 괴롭히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스운 것은 실제로 사티는 약간 반항적인 성격에, 남 괴롭히는 농담을 잘 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사교적이기 보단 은둔주의자의 삶에 가깝고 남과 불화가 많았다. 현실이 꽤나 반영된 꿈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프렌치 감성 느끼기     


한국에서, 내 집 내 방에서 프렌치 감성을 오감으로 흠뻑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추천해 본다.


따끈한 크로와상


첫째, 크로와상이나 바게트 빵, 그리고 와인을 사 온다.

둘째, 상페가 사랑했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셋째,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음식을 즐기며 ‘상페의 음악’ 책을 읽는다. 글씨가 그리 많지 않아 와인을 마시면서도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다. 

넷째, 순식간에 당신은 파리지앵이 된다!







글 - 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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