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5년 8월 국가직 공무원 9급 공채로 임용되고, 2023년 11월, 약 8년 3개월 간의 공직생활을 뒤로 하고 야생으로 나왔다.
나는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TV를 보는 게 힘들어졌다. 그 이유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게스트나 패널들의 리액션이나 반응들이 너무 억지로 뱉어내는 가식적으로 느껴져 받아들이기 거북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이와 빛이 쌍둥이가 태어났을 무렵부터 잔잔한 분위기에서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인간극장>을 즐겨보기 시작했다. 인간극장을 보며 놀란 점은 농사꾼이든, 어부든, 자영업자든 언뜻 보기에 나보다 힘든 삶을 사람들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며 아파도 고통을 삼키며 스스로 일을 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나의 일과 조직을 싫어하는 공무원이었던 나에게는 거칠고 힘든 삶을 사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인간극장을 더 오랜 기간 시청하다 보니 또 다른 관점이 눈에 들어왔다. 농사꾼의 자식은 농사를 짓고, 어부의 자식은 어부가 되며, 자영업자의 자식은 자영업자가 되었다. 물론 인간극장에서 "별빛이네 3대 떡집" 같은 주제로 가업을 잇는 사례를 주로 다루었기 때문도 있지만, 자식들이 부모의 직업을 잇는다는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줬다.
아주 어린 꼬마가 농사에 미치고, 다른 초등학생은 벌써부터 지게차를 몰며 아버지를 돕고, 내 나이 또래의 청년들이 부모에게 호되게 혼나면서도 가업승계 교육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부모가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자식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나는 우리 쌍둥이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공노비 - 공무원의 신분을 낮잡아 부르는 말> 공무원을 준비하거나 공무원에 입직한 이들은 누구나 들어봤을 말이다. 아이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그저 웃으며 나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려 노력할 때 쓰던 씁쓸한 말이었지만, 아이들이 세상에 나온 뒤로는 나의 현실 속으로 후벼 파며 들어온 말이 되었다.
나는 무능한 상사, 동료 때문에 온갖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보상받지 못하여 소모품 취급 당하고, 나에게 욕을 지껄이는 민원인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댔다. 그러다 보니 아침마다, 아니 퇴근하면서, 아니 그냥 눈 뜨고, 숨 쉬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죽을 상을 지으며 출근하기 싫었고, 자이언티의 노랫말처럼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이 싫어졌다.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 졸업할 때 끊었던 욕을 입에 달고 살며, 내 안의 응어리를 토해내며 버티는 진정한 공노비가 되어 버렸다.
"요새는 개천에서 용 안 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아빠가 공노비면 자식들도 공노비가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간극장에 나오는 부모들처럼 자식들에게 모범적인 직업관을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도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이 '퇴사하고 싶다.'는 감정이 '퇴사해야겠다."의 확신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나는 고졸에 8년 넘게 국가행정만 처리했던 30대 중반의 경력단절남이다. 그래도 나는 용감하게 동물원의 철창을 찢고 자유를 찾아 야생으로 나왔다.
사실 아직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할지 모른다. 그냥 묵묵히 포기하지 않고, 걷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일단 걸어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