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본적으로 위트 있는 글이 좋다. 그 경향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거세져서 너무 진득한 글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물론 묵직하고 질척한 글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 그 심연에 마냥 빠져들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있다. 내 인생이 대단히 무겁고 우울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든 후, 나도 모르게 활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화자 혹은 등장인물과 울고 웃고 싶다. 이젠 타인의 작품을 보고 울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작품은 보통 책을 집어 들 때부터 마음이 무겁다. 처음부터 몰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앞서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극히 진지하고 육중한 글을 쓰는데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글은 일기부터 소설, 최근 브런치에 작성하고 있는 이 에세이까지 모조리 진득하다. 어릴 땐 그런 글이 좋았기 때문이다. 심각하고 질퍽해서 보는 이를 숨 막히게 하는 그런 글. 인간의 실존과 삶의 고통을 꿰뚫는 글. 책을 덮더라도 찌르르 심장을 옥죄는 아픔과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글. 문장과 내용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철학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글.
사람들이 너는 소설을 언제부터 썼느냐고 물으면 나는 23세 때라고 답하지만, 사실 진짜 첫 소설은 13세에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것을 소설이라 불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글은 짤막한 희곡에 가까웠다. 중고등학생 때도 꾸준히 무언가를 쓰긴 했다. 주로 장르 소설을 썼고, 대부분 2차 창작이었지만. 그땐 학교 친구에게 읽어봐 달라 공손히 건네주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문학적 특질을 습득한 듯하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내가 좋아한 작품에도 시종일관 진지한 글은 없었다. 진정으로 뛰어난 대문호들은 인간의 실존과 삶의 고통을 써 내려가면서도 재치를 잃지 않았다. 나도 그들처럼 적당히 아프고 적당히 익살스러운 글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타인에게 첫 소설을 쓴 순간을 23세로 꼽는 이유는, 본격적으로 소설다운 소설을 쓰고 타인에게 공개하여 실시간으로 독자와 소통한 것이 그때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소설다운 소설이라는 것은 철저히 나의 기준이므로 당신의 기준과는 다를 수 있다. 그때 나는 여러 개의 소설을 문어발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연재했는데, 그중에는 내 안에 얼마 있지도 않은 재치를 모두 끌어올려 최대한 익살스럽게 쓴 글도 몇 가지 있었다. 최고의 몰입감을 맛보며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하루 만에 2만 자가 넘는 단편으로 완성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글은 스스로 굉장히 의식해 써야 했다. 나에게 쓰기 편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글은 낯 간지러울 정도로 정중하고, 파괴적일 정도로 무거운 글이다. 하지만 그런 글은 읽는 사람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위트 있는 글쓰기를 배우고 연습하려 한다. 마냥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쓸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그런 글은 충분히 많이 썼다. 창작물이란 수용자와의 소통이 중요하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나의 메시지만 발신하는 시대는 죽었다. 받아들이는 상대를 무시한 창작물이 세상에 존재할 리 만무하다. 기본적으로 작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끌고 가면 된다지만, 그 또한 구석엔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나의 글쓰기도 시작으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앞으로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이 써보려 한다. 언젠가 타인의 공감을 깊이 살 수 있는 그런 예술적 글쓰기를 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