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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렌 Oct 27. 2022

계획 강박에서 벗어나기

   계획을 짜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아침 6시 반에 등교를 했고, 아무도 없는 교실의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로 환기를 시킨 후 자리에 앉아 플래너에 하루 계획을 적어 넣었다. 틈틈이 발생하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무엇을 할 지도 꼼꼼하게 적었다. 그 습관은 꽤 나이를 먹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30분 단위의 계획을 짜넣고 그에 맞게 움직이며 실시간으로 실제 한 일을 바꿔 끼운다. 물론 어릴 때와는 달리 기술이 발전하여 지금은 플래너에 수기로 적어 넣지는 않고, 구글 스프레드 시트에 스마트폰과 데스크탑을 교차 이용해 적어 넣지만 말이다.


   이런 경향은 여행을    심하게 작동한다. 성인이 되고 가족과 독립적으로 움직인 개인 여행은 친구를 동반하든 동반하지 않든  계획을 꼼꼼하게 시각화하여 하나의 책자로 완성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오면  책자를 열어 실제 이행한 내용으로 수정하고, 심지어는 영수증을 붙이기도 했다. 대학  학기, 부활절 휴가에 나는 대학 친구와 여행을 갔다. 친구는 그날의 일몰시간까지 적혀있는 나의 여행 책자를 보고 기함했다. 나는 이번 여행은 휴식을 겸하고 있으니 이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며 멋쩍은 변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실행하든 실행하지 않든 나는  책자가 소중하다.  책자는 나의 소중한 기록이자 추억이니까.   책장 한구석에 빼곡히 들어있는 여행 책자를 펼치면  순간으로 다시 비집고 들어갈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나의 경향이 점점 강박이 되었다는 데 있다. 나는 얼마 전 깨달았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매일 공부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수험생의 일과는 거기서 거기. 즉, 너무나도 예상 가능한 범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걸. 어른이 된 나는 매일매일이 폭탄이다. 회사 사무실에 들어서면 시시각각 새로운 일이 터진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 사고를 대처해내느라 나는 그만 녹초가 되고 만다. 하루 종일 팽팽하게 긴장하느라 빳빳하게 굳은 근육을 어찌하지 못한 채로 귀가를 하면, 이번엔 온갖 집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모든 것을 해치우고 나면 어느새 이부자리에 누울 시간이다. 지난 일요일에 짜둔 일주일치 계획은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전자 시트의 네모난 구멍을 생산적인 일 대신 쓸데없는 일로 메우고 잠자리에 든 나는 우울해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도 최근엔 이 강박을 조금이나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휴직을 하고, 나는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나는 시간으로부터도 자유를 얻게 되었다. 시간이 많아 심리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할 일이 많고, 30분 단위로 빽빽하게 짜인 계획에 쫓기며 산다. 화가가 되기 위한 수업도 들어야 하고, 매일 그림 작업도 해야 한다. 그림을 위해 쉴 새 없이 세상을 관찰하기도 한다. 각종 전시를 보고, 영감을 얻기 위해 아름다운 자연을 쫓아다닌다. 독서도 일주일에 최소 5권은 하기로 계획되어 있으며, 내 주변을 떠다니는 글감을 잡아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이 창작을 위한 것이며, 마치 거미줄과 같이 엮여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그 거미줄 속에서, 반드시 이 시간에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가질 필요가 없다. 계획은 있지만,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갑자기 글이 잘 써질 것 같으면 글을 쓴다. 그림에 대한 아름다운 예감이 들면 그림 작업을 한다. 왠지 책이 술술 읽어질 것 같은 감각이 밀려오면 독서를 한다. 나는 그저 큰 덩어리로 된 목표를 향해 작은 시간 단위를 조금씩만 조율하면 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간 운영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인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기계처럼 나를 계획이라는 틀에 가두고 그 틀을 벗어날 때마다 자책할 줄만 알았다. 지나친 자책은 나를 해치는 행위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계획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생의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순간순간 만나는 우연의 반짝임이 나를 더 성숙하고 빛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삶에는 약간의 너그러움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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