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있어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다.
남의 가치에 매몰되어서는 나의 실재를 잃는다. 자기 존재를 잃으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쉽게 병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업 중심 미디어와 SNS의 폭격 속에서, 타자의 욕망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훨씬 더 많이 굴러다닌다. 그 욕망이 나의 가치라 믿어버리면 나를 잃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아프고, 또 고통스럽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나는 나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가치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부모의 생각, 책의 이론, 스승의 조언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감정을 거짓말하지 않는다. 감정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나의 감정을 잘 돌봐야 하는 거였어. 그런 거였어. 쉼 없이 나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어? 하고 물어봐야 하는 거였어.
그동안 내가 나에 대해 오해했던 한 가지. 나는 자아가 비대한 인간이 싫었다. 그렇기에 나도 나의 자아를 지우려 안간힘을 썼다. 본인의 일일수록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관조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실존은 지워지고, 이 때문에 우울이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나에게 나는 너무나도 약하고, 유치하고, 모순적이며, 비겁하면서도 철없는 존재여서 누군가에게 나를 내보이는 게 두려웠다. 나에겐 내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히 침묵을 선택했다. 조용히 나를 숨기고 은신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거였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적 불안과 외로움을 안고 태어난다. 나에겐 이렇게나 생생하게 내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나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를 또렷하게 내보이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다. 본디 성취에 대한 인정과 주목은 중요치 않다. 그게 맞다면 왜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인간에겐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이 주식(主食)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과 공감을 받아본 적이 없다. 부모님에게조차 나의 월등한 성적, 타인에게 자랑할만한 성과만이 주목 대상이었으니까. 나 또한 내 존재 자체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래서 껍데기가 중요했다. 상위권 대학. 평균 이상의 연봉을 주는 회사. 상사가 인정하는 나의 업무 능력. 나는 쉴 새 없이 노력하여 타자의 기대에 부흥했고,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껍데기를 쉬이 버릴 수 없었다. 그게 다 내가 받는 인정과 주목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속였다. 그렇게 헛된 껍데기를 입고 오랜 시간을 살아서 나조차도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 내 존재 자체에 대해 주목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닐까? 순수한 나를 드러낸 적이 없으니, 누가 나에게 주목해주겠냔 말이다.
이제 나는 변하고자 한다. 껍데기를 걷어내고, 은신하는 삶의 방식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나의 감정과 실체를 마음껏 드러내려고 한다. 익숙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그래도 노력하려 한다. 그럼 언젠가는 나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나는 타자의 욕망에 조종 당해 억지로 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천진난만한 아기로 돌아가, 내가 사랑하는 예술을 격렬히 탐구하는 구도자가 되리라 다짐한다. 니체가 말했듯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기로. 그러면 언젠가 거룩한 창조 정신을 위시하여 삶 자체를 예술로 만든 초인이 되리라.
비교적 최근까지도 나는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내가 나 자신을 너무나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나는 돈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 이유도, 금전적 풍요를 누리면 진정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확률의 문제다. 많은 돈은 가능성을 높여줄 뿐, 보장해주지 않는다. 애초에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담겨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왜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했을지도. 도전할 용기가 없어서. 심리적 박탈감을 부유하지 못한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 그렇지만 그건 전혀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술을 할 뿐만 아니라 돈도 벌어야 한다. 창작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 목표는 성공이 아니며, 성공한다고 멈출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굶주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없으니까. 돈을 벌기 위해 그리지 않는다. 창작을 위해 돈을 번다. 나는 작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껏 창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자유를 사기 위해 돈을 벌 것이다. 두둑한 배와 충만한 영혼으로 창작하기 위해서. 제프 코인스는「예술가는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말했다. "예술가의 첫 의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며, 두 번째 의무는 예술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라고. 나는 이 말을 앞으로 계속 되새기며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예술가가 되리라.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