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렌 Oct 21. 2022

인간 불신자의 인간 예찬

   얼마 전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2006~2014)이 노벨 경제학상 수상 기념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앞으로의 경제 전망에 대해서는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를 하신 지라 시큰둥했지만, 오히려 회견장에서 나온 "젊은 경제학도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심금을 울린다. 


    “살면서 배운 교훈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과도하게 계획을 세우지 말라.”

    “당신이 20년 뒤에 뭐가 돼 있을지 알 수 있다고 생각지 말고 그저 다양하게 경험하고 배우면서 여러 부류의 많은 사람들과 일하라.”

    “이것이 우리 사회와 경제에 예상치 못하게 일어나는 변화를 다룰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게 되는 방법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적용해야 할 중요한 잠언이다. 레이 달리오도 그의 저서 "원칙"에서 말한다. 극도로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이미 한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두 전문가의 이야기가 한 곳으로 통하는 걸 느끼고 나도 모르게 전율했다.


   역시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 SNS에서 접하는 지식은 몹시 편파적이며 본인도 모르게 취사선택하여 흡수하기 때문에 점점 편협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책은 경직된 사고를 유연하게 풀어주며 좁은 세계를 확장해줄 수 있다. 다양한 책을 읽고 말랑한 뇌를 유지하자. 극도로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지식을 접하자. 나에게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나만의 명령.


   인간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그 유형대로 사람을 멋대로 판단 및 재단하며, 각종 혐오가 판치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그 기조에 매몰되었다. 이 경향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정신 건강에도 직간접적으로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J형 인간이니까, 30분 단위의 계획을 세우는 게 당연한 거지.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그리도 얄팍하게 마름질할 수 있겠는가. J형 인간이라고 다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J형 인간이 P 성향을 가지지 못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애초에 MBTI란 균형적인 성격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십수 년 전부터 배우지 않았던가? 나를 J로 규정해버린 나의 선입견이 내 안의 P 성향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다. 나는 매우 치밀한 계획을 세우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막상 계획을 세우고 나면 일에 몰두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해보지도 않고 추측해서 세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나에게 즐거움과 함께 큰 고통을 준다. 철저히 세운 계획을 하나하나 달성해 가며 맛보는 짜릿함에, 일단 떠오르면 저질러야 하는 나의 성향이 나도 모르게 억압당하고 있는 거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디 개개인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심리적 체계를 지녔으며, 그렇기에 매우 입체적인 동물이다. 그렇기에 다채롭고, 유연하다. 충분히 선하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성악설을 믿는 철저한 인간 불신자인 나는 이 사실을 독서를 통해 배웠다. 그동안 난 휴머니즘을 노래하는 창작가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란 나에게 너무나도 거추장스럽고 족쇄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다. 나 또한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생각이 변화하면 성질도 변화한다. 인생에는 분명 우연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이는 경직된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갸륵함이다. 나도 놀랄 이 변화의 중심엔 책이 있다. 독서 만세!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 지혜를 거침없이 나눠준 선인(先人)들에게 경배를.



작가의 이전글 예술가가 될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