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는 건 쉽다. 이해할 결심이 어려울 뿐 : <꾸미는 사랑에는 이유가 있어(2021)>
着飾る(きかざる,kikazaru)는 '몸치장을 하다', '차려입다'는 뜻이다. '입다'의 着(き,ki)와 '장식하다'의 飾る(かざる,kazaru)가 합쳐져, 멋있는 옷을 걸치고 마치 공작새처럼 한껏 자신을 뽐내는 모양새를 연상시킨다. SNS 인플루언서 활동으로 인테리어 회사를 대표하는 마시마 쿠루미에게, 이보다도 더 그녀를 잘 설명할 단어는 없다. 매일 정해놓은 시간(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속할 만한 시간)에 게시물을 올리고, 다음날의 새로운 네일 색상과 착장을 고민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보여지고 평가받는 것. 이것이 그녀가 사회인으로서, 나 자체로서 중요시하는 최고 가치다.
개성있되, 타인에게 불편감은 주지 않아야 한다. 지나친 개성은 '너무 튄다', 지나친 무난함은 '흔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꾸밈의 범주'는 오히려 새로운 틀을 넘어 족쇄가 된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기 전에도 멈칫,한다. 지금 나, 괜찮지?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때 뒤에서 그녀의 등을 힘껏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괜찮지. 안괜찮을 게 있어?
옷이란 두세 벌만으로 충분하고, 욕심부리지 않고 뭐든지 모자르지 않을 정도로만 갖추는 삶을 추구하는 후지노 슌. 그는 미니멀리스트 중에서도 미니멀리스트다. '집'이라는 필요에 의해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겹칠 일 없이 살아갔을 둘이다. 그만큼 극과 극, 대척점에 서서 팔짱 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존재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와 100%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은 없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아니다, 그 반대다. 0.01%라도 나와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 행동을, 그 말을, 나는 이해'해야만'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이게 맞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상식이 오답이 아니지만 정답도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동일하게 타인의 상식이 정답은 아니지만 오답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관용은 너무나도 힘이 드는 작업이고, 배척은 참으로 간단하다. 따라서 우리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만 의지한 채 나만의 '이해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건 쉽게 내친다. 문제는 이해란 의외로 딱 떨어지는 수학공식 같은 것이라서, 내가 하는 만큼 받게 된다. 타인을 이해하는 만큼, 나도 이해 받는다.
'사랑도, 나답게(恋も、私らしく)' 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나답게 행동하는 건 무적의 불문율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즐겁다고 느끼는 대로 살아가는 게 삶에 대한 제 1원칙이다. 어딘가에서 나를 가짜로 포장하면, 반드시 그부분에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리는 순간이 온다. 단, 반드시 이해받고 싶은 만큼 타인을 이해하는 미덕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
사실 着飾る(きかざる,kikazaru)에는 앞에선 언급하지 않았던 의미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성장하다'이다. 이처럼 나답게, 멋있게, 보여주고 싶은대로 스스로를 완성해가면서 상대의 모습도 그자체로 포용할 때 비로소 성장하며 완벽한 着飾る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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