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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TAX Jan 01. 2023

동학농민대전 2040 제1화

사이버펑크가 가미된 대체역사소설, 나도 써보자

 때는 포덕 235년 4월 24일. 대한민국은 개국 200주년 기념행사로 시끌벅적하였다.


“과거 서기 1894년 시작된 민란의 불꽃은 이미 조선땅을 뒤덮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청과 일은 황제의 파병요청을 빌미로 조선을 점령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음모를 알아챈 조정은 그 사실을 알아챈 당시 이미 손발이 잘린 뒤였어요. 그러나 보급에서 지속적인 갈등이 있던 조선관군은 돌섞인 군량미를 씹어가며 동족을 시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진하여 투항하고 동학군으로 돌아섰습니다. 관군의 합류로 손병희와 전봉준은 공주 우금치고개에서 청일 연합군으로부터 승리하였고, 이러한 기세를 몰아 조선동학연합군은 1895년에 이르러 경복궁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분 계신가요?”


행사도우미의 설명에 눈빛을 반짝이는 소년이 오른팔을 귀에 붙이며 질문했다.


“왜 최시형 교주님은 초대 대동령으로 손병희성사를 추대하셨나요?”


“네, 그건 사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것과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해요. 당시 개혁의 방향은 입헌군주제였지만, 서양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었거든요. 우리나라는 농민으로부터 일궈온 나라이고, 지금도 우리나라는 세계 제일의 농업과학국가입니다. 비록 국토는 작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종자저장고를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종자가 전세계의 식량난을 해결했지요.”


“그럼 녹두장군님은요?”


“녹두장군님도 같은 생각이셨던것 같아요. 나라를 이끄는 것과 군을 이끄는 것은 다르다고, 그래서 혁명이 성공한 이후 녹두장군은 스스로 나라를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고 하셨다고 해요. 물론 당시 많은 조선인민의 반대로 국방을 담당하는, 지금의 국방부 장관의 역할을 역임하셨지요. 아, 다음은 녹두장군 생가모형을 갈 시간입니다. 여러분, 저를 따라오세요!”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비로소 서학의 장점을 차용할 수 있다는 교육관을 가지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개국 이후에도 청과 일은 호시탐탐 혼란스러운 조선땅을 신탁통치하고자 하였고, 서양 또한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청과 일, 그리고 서양의 다수의 국가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지정하였고, 혁명군은 반성과 자정을 통하여 겨우 국가를 수립하였다. 세계 많은 국가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다시 몰락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전세계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조선땅에 다시 한번 일어났으니, 그것은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김옥균이 사실 녹두장군의 보호로 망명에 성공하였고, 그동안의 연구를 토대로 혁명조선의 기틀을 청사진으로 찍어낸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한지 5년만에, 천도교를 국교로 하는 대한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호가 전세계에 선포되었다.     


 대한민국은 비록 국교를 천도교로 지정하였으나, 종교의 자유가 있는 국가가 되었다. 개국 당시 많은 인민의 인식은 ‘서학을 배척하는 것’이었으나, 김옥균은 자유민주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국가의 기원을 전파하였고, 많은 동학의 스승들은 이러한 지식을 흡수하면서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가르침과 서양의 인권신수설, 즉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권리라는 사상과 주체의 차이만이 있을 뿐, 결국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신분제에 있어서도 많은 갈등이 있었다. 혁명 이후에도 사농공상을 따지거나, 출신을 따지며 개국 이후에도 이러한 체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인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금방 정리되었다. 성공한 혁명 뒤에는 수 없이 많은 솎아내기가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모두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신분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많은 양반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리고 신분제로 고통받던 많은 인민은 프랑스의 앙시앙레짐이 파괴되고 인권선언을 들게되면서, “사실 서학도 무조건 배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비록 조선의 혁명과 대한민국의 개국은 서학의 배척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서학의 무분별한 배척은 결국 추후 외세의 침략을 방조하는 것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현실화되었다. 결국 개국 이후에도 개화파들과 온건파들의 갈등은 수십년간 이어졌으나, 개화파들은 온건파들의 탄압에도 묵묵히 서양문물의 동양화를 이루어냈다. 과학을 받아들였으며, 서양의학을 흡수하여 기존 한의학을 현대화하였고, 수원화성, 석굴암에서 착안한 건축기술 등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가사업으로 농업과학에 집중하였다. 인민에게 더이상의 식량난이 발생하지 않게 하자는 긍휼한 마음에서 시작한 사업은 우장춘박사가 유전학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품종개량에서 유전공학의 발전까지 이루어냈다.


 어느덧 대한민국은 척박한 땅에도 뿌리를 내리는 볍씨“굳세미”를 개발하여 아프리카에 이를 헐값에 보급하기도 하고, 농약없이도 자라는 “이기미”, 탄수화물 비중이 높아 적은 양을 섭취하여도 든든한 “배부르미”,  식물성 단백질 성분이 풍부한 “단다미”등을 개발하였다. 전세계 식량난을 해소한 대한민국은, 이미 전세계에서 우러러보는 첨단농업국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녹두장군이 김옥균을 만나게된 경위는 후대에도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갑신정변은 실패하였고, 당시 인민은 김옥균의 일본망명, 그리고 일본에서의 난잡한 삶을 이유로 조정과 인민의 대역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이를 댓가로 홍종우에게 관직을 주었다고 믿었다. 홍종우가 관직을 얻었다는 것에 인민들이 다소 위화감을 가졌다면, 김옥균의 시신이라고 하는 물체가 양화진에 거열되었을 때에는 인민들도 다소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조정을 능멸한 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나, 그 결과를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녹두장군과 김옥균 사이에 밀정이 있었고, 그 밀정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몰락양반의 자제가 이 둘을 연결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고, 김옥균이 일본에서 난잡한 삶을 살다가 결국 암살당했다고 조선에 소문을 내고, 녹두장군이 무력으로 남접의 동학교인을 일으켜 세우는 것에 반대한 북접의 지도자들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밀정의 정체는 후대에도 알려진 바가 없다.


 개혁의 성공 이후 혼란스러운 조선에서 우리의 개국공신들 또한 마땅한 비책이 없었다. 결국 김옥균을 필두로 한 개화파와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온건파의 협동으로 개국을 하였으나, 이 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이 개국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온건파는 동학에서의 유교, 도교, 불교의 교리, 이른바 삼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한 국가운영 및 서학의 배척을, 개화파는 대한민국, 중국, 일본 3국이 동아시아를 이끄는, 이른바 삼화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운영과 서양문물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녹두장군은 김옥균이 개국 이후 조선을 이끌 인물이라는 결단으로 김옥균을 보호하는 것에서 개혁의 동지로 우정을 쌓았으나, 개국 이후 둘의 친분은 적어도 외부에 공표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개국초기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었다. 비단 정치적인 문제에서만 이러한 갈등이 고착된 것도 아니었다.


   세계는 조선의 부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이 중립국선언을 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했으나, 전세계는 화약과 총알로 신음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세계대전 이후 식량산업과 의료수출을 통하여 세계 제일의 농업허브와 의료허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류의 고통에 깊히 공감한 대한민국의 지도자들 모두가 전쟁특수로 대한민국이 성정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는 못한 것이다. 식량수출은 온건파가, 의료수출은 개화파가 각 담당하였고, 각자의 사업을 자신의 주특기로 삼게 되었다.


 행사장 관람을 마친 소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자곰방대를 피고있는 성인 남성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끽연은 마치셨나요? 저도 관람을 마쳤습니다.”


 소년의 깍듯한 말에 남성은 허둥지둥 두루마기 안주머니에 담배를 숨겼다.


 “아들,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그나저나 어때? 재미는 있었어?”


 소년은 관람의 희열이 끝나지 않은 표정으로 남성에게 외치듯 대답했다.


“아버님이 자주 해주시던 이야기라 이미 다 알고있었어요. 그치만 재미있었어요”


 남성은 뿌듯하면서도 수줍은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노상주막에서 녹두전에 파랑새 막걸리를 팔더라. 하나는 우리가 먹고 하나는 엄마꺼 포장해가자”


 소년과 남성은 현대인들이 팝업스토어라 부르는 가게 입구에서 줄을 섰다.


 행사가 한창인 오후, 관상감은 일찍이 날씨가 맑고 쾌청할 것으로 일기예보를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먹구름이 가시지 않았다. 관상감의 일기예보는 사실 현대에 이르러도 잘 맞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맑은 봄날씨를 예상하고 갑작스런 봄비가 올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아버님, 비가 오려는 걸까요?”


 녹두전을 먹다말고 소년이 남성의 눈치를 보았다.


 “비가 오면 차에 다녀올게, 혼자 있을 수 있지?”


 고개를 갸웃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습하지 않은 대기에 생뚱맞은 먹구름이 개국행사장이 설치된 광장과 정읍시 청사 위로 가득했다. 주차장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나, 행사장 한복판에 아들을 두고 우산을 가지러 가는게 맞는지 고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행사 도중에 하늘을 바라보며 먹구름에 대하여 한두마디씩 하였다. 행사장의 사람들이 고민하다 주차장으로, 지하철로 발길을 옮기는것을 보며 한숨을 쉬는 사람은 정읍시장뿐만이 아니었다. 파리만 날리는 자기 회사의 팝업스토어 한구석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학도는 이미 귀딱지가 앉은 직원에게 다시금 신세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가서 앉아만 있어도 된다고 그래서 가기싫은 야외영업까지 나왔는데 객들이 다 귀가하네, 우리도 판 접을까?”


학도의 불평에 직원이 만류하자 학도는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색으로 직원을 잡아먹으려는 난리를 쳤다.


 “너도 내가 음서전형이라 무시하냐? 우리 아버지 누군지 몰라?”


 직원은 학도의 레파토리를 이미 숙지하였으므로, 오늘도 적당히 넘어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학도를 달랬다.



 행사장에 먹구름이 나타난지 벌써 2주 정도가 지났다. 사람들은 하늘의 노여움이라고도 하고, 유전공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나타난 기현상이라고도 하였다.


 남성은 국장실에 들어가기 앞서 보고계본에 오타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남성은 본디 공직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온건파 사상을 강요하는 부모님의 성화를 못이겨 뒤늦게 행정고시에 응시하여 동기보다 늦은 나이로 행정사무관이 되었다.


 오전에 기상을 분석하는 기관인 관상감의 결과를 통하여 사안을 분석함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는 국장의 분노를 일으키기 좋은 내용이었고, 지금 들고있는 보고서는 배달음식으로 점심을 떼운 다음 부랴부랴 다시 작성한 것이었다.


 국장실의 비서는 말없이 입으로만 욕을 하고 있는 남성에게 나뭇잎을 띄운 냉수를 한잔 올렸다. 보고도 식후경이라고, 점심식사 잘 챙기드시냐는 인사도 곁들였다. 남성은 비서에게 아녀자가 지아비에게 이러면 안된다는 능청스런 말로 감사인사를 대신하면서 입은 기분이 좋아 이죽거리고 있었다.


 “들어와!”


 국장의 불호령에 남성은 노크도 잊고 장관실에 들어갔다.


 “그래서, 대체 정체가 뭐라는거야?”


 채집도 무엇도 불가능한 구름같은 그것은 비구름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밝혀진 것이 없었다. 관상감 또한 기후현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을 뿐 별도의 물질분석은 실패한 것으로 회신을 받았다.


 “인체에는 아직 밝혀진 피해가 없다고 합니다…만”


 남성의 변명같은 대답에 국장도 포기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을 옆으로 넘기며 장관은 쇼파에 등을 기댔다.


 “시장님이 엄청 쪼는데…”


 남성은 국장이 오전에 자기에게 화를 낸 이유가, 자신의 보고서가 개판인 것 외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였다. 그러나 국장은 눈동자를 부라리며 다시 몸을 일으켜세웠다.


 “세상에 질량이 없는 물질은 없어…”


 남성은 국장이 어쩐일로 바른말을 한다 싶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포집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포집한 뒤에는 곧바로 전부 분해되어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연기처럼..


 “국장님, 우선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남성은 딱히 대책없이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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