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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약방 Dec 15. 2022

나의 인턴 일지

모로의 몸의 일기 _ 5

 금요일 오전, 나는 일리치 약국으로 간다. 평소에는 세미나를 하거나, 화장품을 사거나, 먹거리를 구매하러 들르지만, 이날은 다르다.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약국 문을 열면 언제나 한약 냄새가 난다. 아침에는 밤새 달인 한약이 가득하니 냄새가 더 진하다. 일리치 약국의 약탕기는 총 4개. 작은 공간 안에 도자기로 된 약탕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주로 쌍화탕 주문이 많고, 요즈음엔 여름 보약 생맥산이 유행이다. 중간마다 개인 의뢰 한약들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약탕기 4개가 모두 차 있으면 왠지 마음이 그득해진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은 거기도 하지만.


  약탕기의 도자기는 크고 무겁다. 처음에는 도자기 안에 뜨거운 한약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혹시나 쏟을까 봐 심장이 쫄깃했다. 전날 약재들과 함께 물을 가득 넣어놓으면, 12시간 동안 천천히 달여진다. 다음 날에는 전날 달여놓은 한약을 포장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오늘 할 일이다. 나는 손을 깨끗하게 씻고, 커다란 약탕기를 내리고 그 안에 있는 한약 보자기를 꺼낸다. 커다란 냄비에 한약을 옮겨 담고, 혹시나 남아있을 한 방울을 위해 한약 보자기를 쥐어짠다. 그냥 바로 소분해서 비닐 포장을 해도 되는데, 일리치 약국에서는 다시 그걸 가스 불에 팔팔 끓여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변질을 방지한다.


  한약이 든 냄비를 들고 주방으로, 약국으로 왔다 갔다 한다. 팔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는다. 비실비실한 무릎이 긴장한다.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는 동안 약탕기를 모두 물에 씻는다. 하나하나 씻다 보면 갈색의 물이 흘러나오는데, 왠지 그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약재 물로 손이 좀 촉촉해지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한다. 잠깐 생각을 딴 데 두고 있으면 한약이 파르르 끓어버린다.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후다닥 달려가서 불을 끄고 다시 한약이 든 냄비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포장기계에 붓는다. 우리가 흔히 보는 한약은 비닐 포장 팩에 담겨있다. 소분해서 진공으로 포장하는 단계다.


  요놈이 참 신기하다. 기계인데 마치 사람처럼, 뭔가 정확하게 딱딱 결과물을 내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쌍화탕을 기준으로 하나의 도자기에 담긴 양이 한재라고 하면, 팩으로는 30개 정도의 양이 나오는데, 120g 전후를 포장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기계는 포장 용량을 120g으로 설정하면 130g이 포장되어 나온다. 엥? 120g으로 포장하고 싶으면 115g을 입력한 후 포장 개수를 한두 개 줄여야만 가능하다. 이게 뭐야? 이 아이는 단지 한약 포장을 위해서만 나온 기계가 아닌가. 그런데 왜 수치대로 뽑아내지를 못해? 이 공기, 온도, 습도가 다 상관이 있는 걸까? 숙련된 일리치 약국의 일꾼인 기린쌤의 진두지휘 아래 일을 배울 때는 아무런 문제 없이 척척 포장해냈다. 하지만 비법 노트에 꼼꼼히(?) 적어둔 대로 혼자 이 기계를 호기롭게 가동했을 땐, 아뿔싸. 96g이라는 턱없이 작은 양을 포장해냈다. 분명 115g으로 입력하고 총량도 잘 넣었는데…. 내가 애송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거지? 부랴부랴 기린쌤을 다시 소환했더니, 정상적으로 120g을 포장해냈다. 소오름!


  그렇다. 정말로 기계도 우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한다. 어떤 미묘한 무언갈 내가 캐치를 못 했던 거겠지. 쌍화탕은 보기에도 탁하고, 생맥산은 맑다. 그 농도에 따라서 포장량이 조금씩 달라진다. 더우면 더운 대로, 습하면 습한 대로 날씨에 따라서도 결과물이 조금씩 달라진다. 몇 번 실패하고, 다정하게 대화도 몇 마디 나누다 보니 나도 이 기계와 조금 친해졌다.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긴 하지만, 이젠 능숙하게 쌍화탕을 뽑아낸다. 이런 똑같은 과정을 4번 반복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포장기계를 깨끗하게 씻는다. 한약 주머니를 한곳에 모아서 팍팍 삶은 뒤 햇볕에 말려 놓으면, 오늘의 일은 끝이다.


  매번 일리치 약국의 쌍화탕을 사 먹으면서도, 이렇게 자잘한 공정이 많을지는 몰랐다. 그냥 버튼만 턱턱 누르면 쌍화탕이 쏟아져나온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들에는 여러 사람의 수고로움이 묻어있다. 내가 처음 한약 포장 알바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딘가에 나의 수고로움이 쓰이고 싶어서였다. 가정주부로써 하고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미있는 무언가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무기력했다. 단지 돈을 주고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내 두 다리로 들고, 팔이 아파가면서 어떤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나에게 필요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관계 맺고, 기계와도 상호작용을 하면서 몸으로 조금이나마 세상과 소통해보고 싶다. 집에 돌아가면 고작 2시간 일했을 뿐인데 녹초가 된다. 팔목도 쑤시고 온몸에는 한약 냄새가 난다. 그 냄새를 맡으면서 30분 정도 낮잠을 자는 맛이 너무 좋다.


  아, 제일 중요한 것이 남았다! 포장하다가 딱 떨어지지 않아서 조금 남은 쌍화탕. 그 뜨끈뜨끈한 쌍화탕을 홀랑 털어 마시는 맛! 캬~ 역시 바나나킥의 가루처럼, 소보로 빵의 부스러기처럼 핵심은 남은 쌍화탕에 있었다. 꺼억~ 오늘도 잘 먹…. 아니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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