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연습도 도움이 되긴 하지만
2024년, 다시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쩍 시간이 빠르다고 느낍니다. 초, 중, 고를 거쳐 대학생 때까지는 어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삶이 권태롭다고 느꼈습니다. 학기 중에는 매일 방학을 기다리며 달력만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군대를 가서 최악의 시간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군부대에는 분명 중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망상으로 지루한 경계근무와 고된 훈련을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갈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걸 보니 앞으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23년은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해였지만 게으르게 흘려보낸 시간은 온전히 제 탓이라고 여깁니다.
24년 계획메모를 작성하기 위해 메모장을 열어보니 재작년에 작성한 23년 계획메모가 메뉴 저 아래쪽에 처박혀있습니다. 해야 할 공부, 목표하는 작업, 구매해야 할 악기, 저축 목표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는데 악기만 신명 나게 사들이고 돈만 펑펑 쓴 것 같습니다. 특히 SNS 열심히 하기, 매주 콘텐츠 업로드하기 등의 목표를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방치해 두었습니다. "선생님 브이로그 언제 올라와요?", "인스타에 왜 이렇게 게시물이 없어요?"라는 학생들의 질문에 "원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매체와 친하지 않아서"라는 핑계로 무마했습니다. 브런치는 친절하게도 글 좀 쓰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띄워줍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블로그이니까 부담 느끼며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라는 변명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열심히 양질의 글을 발행해야 사람들이 찾을 텐데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열심히 안 한다는 건 사람들이 찾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자기반성중입니다. 우선 올해 목표는 일주일에 블로그 글 한편 발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약속이 잘 지켜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약속을 어기고 싶지는 않아 꾸역꾸역 컴퓨터 앞에 앉아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할까 고민 중에 작년에 국내 최대의 음악 커뮤니티 '뮬(Mule)'에서 화제였던 '카피(Copy)'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작곡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레슨을 받을 돈은 없으니 카피로 독학을 하려 하는데 카피하려는 곡들의 난이도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곡적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테크니컬 한 곡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난이도가 너무 높아 보입니다. 많은 아마추어와 프로 음악가들이 조금 쉬운 곡을 선택하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자신은 이 세 곡을 완벽하게 카피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작성자가 결과물을 가져왔지만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게시글과 댓글은 결국 돌고 돕니다. "혼자서는 힘들어 보이니 레슨을 받아라", <레슨 받을 돈이 없다>, "그럼 곡을 쉬운 걸로 바꿔라", <이 곡들을 완벽하게 하기 전까지는 다른 건 하지 않겠다>, "그럼 우선 화성학 책을 한 권 사서 기본적인 이론공부를 해라", <어느 단톡방에서 카피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카피가 안되지 않느냐? 차라리 레슨을 받아라", <레슨 받을 돈이 없다>. 결국 이 작성자는 '카피빌런', '카피좌'등으로 불리며 비아냥의 대상이 됐습니다. 처음 시작하려는 입문자에게 너무 가혹한 민심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심 어린 조언을 '돈이 없다'로 일축하는 작성자에 대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단톡방에서 카피를 하라고 했다"라는 말은 아마 처음 시작하는 단계의 입문자인 작성자가 어느 정도의 음악력이 있는지,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모르고 우선 일반적인 작곡 공부 중 하나인 카피를 언급한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레슨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변에 도움이나 조언을 청할 곳도 없었을 테고 커뮤니티나 메신저를 통해 알게 된 짤막한 조언 한마디에 매몰된 것 같아 무척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카피는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음악공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작곡뿐만 아니라 기악 역시 반드시 카피를 통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중학교 1학년, 기타를 시작하면서 처음 배웠던 곡이 노사연의 「만남」입니다. 저희 세대의 음악이 아닌 곡을 배우면서도 아르페지오 주법을 적용시킨 첫 카피곡을 만나서 즐겁게 연습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 일렉기타를 잡고 귀카피에 도전했습니다. 귀카피는 악보 없이 순수하게 듣고 똑같이 연주하는 걸 이야기하는데 첫 도전곡이 Led Zepplin의 「Stairway to Heaven」이었고, 약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음악생활을 해오는데 큰 도움이 된 경험이었습니다.
우선 카피 자체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6개월 동안 끈질기게 한곡만 판 덕분에 하면 된다는 걸 알았으니 어떤 곡도 카피할 수 있다는 자심감은 난이도에 구애받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 훌륭한 밑천이 됐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청음 실력 역시 향상했습니다. 카피를 하던 당시에는 몰랐지만 카피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서 곡을 듣는 것만으로 대략적인 화성진행과 선율, 악기 편성 등 음악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개별로 그리고 합쳐서 듣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도 아쉬운 건 조금 더 똑똑하게 접근했다면 같은 6개월 동안에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점입니다. 예전에 저와 같이 기타를 배우던 친구가 떠오릅니다. 저와는 다른 학원에서 기타를 배우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 그 친구의 기타를 보니 지판에 음자리 스티커를 빼곡하게 붙여놓았습니다. 마치 바이올린을 처음 배울 때 음정을 정확하게 연주하기 위해 붙이는 것처럼. 저는 참 신기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따라서 지판을 달달 외워버렸습니다. 결과는? 역시 도움이 됩니다. 창의적인 연주와는 별개로 우선 지판을 다 알고 있으니 멜로디 연주에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기타 선생님, 어떤 학원을 가더라도 지판 트레이닝을 저런 무식한 방법으로 시키지 않습니다. 근음을 기준으로 어느 위치에 몇 도 음정이 있는지, 즉 중심을 기준으로 주변을 파악하는 키 중심 기반의 교수법이 상식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처럼 힘들게 6현을 전부 외울 필요 없이 5(A), 6(E)번 줄만 알아둔다면 모든 지판에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초견 위주의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경우나, 프렛이 없어 정확한 음정으로 연주하기 어려운 현악기가 아니라면 후자의 방법이 기타 보이싱과 코드톤, 스케일 등의 즉흥연주 기반에 적용시키기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다시 작곡 카피로 돌아와 나의 경험을 생각해 봅니다.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고 처음으로 큐베이스 화면을 열었을 때 들려오는 막막함이 먼저 떠오릅니다. 물론 지금은 DAW로 로직을 사용하지만 어쨌든 큐베이스나 로직 둘 다 아무것도 없는 처음 화면을 마주 보고 느끼는 숨 막힘은 여전합니다. 기본적인 조작법을 익히고 우선 카피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곡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열심히 한 땀 한 땀 최선을 다해 비슷한 모양새로 만들려고 애썼던 기억이 납니다. 덕분에 드럼, 베이스, 건반 등의 미디 에딧팅을 손에 익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습니다. 한곡 한 곡 카피를 해나갈 때마다 크게 지루함을 느꼈고 어느 순간부터는 카피를 완성하지 못하고 버리는 프로젝트만 한가득 쌓이게 되었습니다. 자성해 보면 의미와 목적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열심히 작곡을 배우는 레슨생이 있습니다. 커리큘럼상 기초과정이 끝났고 이제 본격적인 악곡제작실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드럼과 베이스의 콤비네이션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통한 레슨이 진행됐고, 숙제로 리듬을 만들어 오라고 내주었습니다. 드럼과 베이스만 존재하는 리듬을 꽤 그럴듯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진도를 더 나가도 될 것 같아 대중음악에서 사용되는 스트링 쿼텟 편곡을 레슨 했습니다. 제법 스트링 쿼텟도 잘 만들어 옵니다. 이제 자유곡을 쓸 차례인데 여기서 한참을 막혀 지지부진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이럴 때 카피가 필요합니다. 본격적으로 악기들이 어떻게 합쳐지고 분리되는지, 언제 등장했다 언제 퇴장하는지 선율과는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기껏 좋을 멜로디를 써놓고도 곡작업은 진척이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곡을 하나 카피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 것처럼 듣고 통째로 베끼는 방식은 아닙니다. 카피할 곡을 선택하고 보컬트랙만 남기고 다 지운 음원을 제공했습니다. 순서대로 드럼과 베이스를 입력하고 스트링을 레이어드 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과제 조건은 1. 원곡과 최대한 비슷하게 할 것(시중에서 판매하는 악보를 참고해도 됨) 2. 로직이 제공하는 기본 가상악기를 사용할 것 3. 드럼과 베이스가 어떻게 호흡을 맞춰가는지 파악할 것, 특히 베이스가 근음 이외에 어떤 음을 사용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할 것 4. 전체 송폼을 파악해서 분석하고 이것을 1장짜리 리드시트로 만들어 같이 제출할 것 5. 사용된 모든 악기가 기재된 풀 스코어를 만들어 제출할 것 6. 음악이 진행 중 똑같은 부분이 있으면 새로 만들지 말고 복사하여 붙여 넣기 할 것.
작곡을 해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위의 과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리실 것 같습니다. 우선 악기 간의 콤비네이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특히 처음에 베이스를 어떻게 사용할지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드럼과 기타・피아노・보컬 사이에서 리듬과 화음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목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근음만 정박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다른 코드톤을 사용하는지 리듬을 잘게 나눌 때는 어떤 악기와 호흡을 맞추는지 등을 파악하기 위한 카피입니다.
그리고 이 카피 과제에서 어떤 음악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르게, 새로운 것만 등장하며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음악이 진행하면서 물론 빌드업을 해야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1절과 2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복사 붙여 넣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편곡적으로 조금씩 확장을 하거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기본 틀은 같기 때문에 예전에 제가 긴 곡을 카피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새로운 걸 카피하는 것처럼 느꼈던 헛수고를 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에딧팅에 대한 본격적인 실습을 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힙합이나 EDM, 댄스음악처럼 신시사이저의 음색이 강조되고 정박자에 딱 들어맞아야 하는 음악 장르가 아니면 기본적으로 미디의 목적은 실제 악기와 최대한 유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령 베이스를 연주하다 보면 왼손이 현위를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치찰음이나 컷팅을 했을 때 들리는 '탁' 하는 소리, 고스트노트 등 가상악기에서는 보기 힘든 리얼한 사운드를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드럼의 경우 단순히 마우스로 미디노트를 입력하면 모든 벨로시티값이 동일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실제로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 하더라도 매번 세기와 타이밍이 완벽하게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드럼을 에딧팅 하기 위해서는 이점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현악기는 특히 까다로운데 레슨에서 실제 현 레코딩을 진행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상악기를 골라 작업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끝나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들기 마련입니다. 레이어를 쌓아가야 합니다. 비단 현악기뿐만 아니라 드럼 역시 레이어를 쌓고 여타 다른 악기들도 필요하다면 몇 겹이고 레이어를 쌓아나가야 합니다. 이 카피연습을 통해 같은 종류의 다른 음색을 가진 여러 악기를 섞어서 사용하는 방법을 공부했습니다.
아무래도 목적 없는 카피연습은 단순노동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음악연습에 있어서 단순노동도 역시나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껏 긴 글로 '목적을 가지고 연습하시오'라고 성토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기 연습을 그렇게 합니다. 특히 악기를 연습할 때 기본기 연습(하농, 스케일, 코드톤 등)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몸만 움직입니다. 사실 기본기 연습을 할 때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몸만 열심히 작동시켜서 나중에 기능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로 아침에 기본기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잠이 덜 깼을 때 멍한 상태로 손만 움직이고 그날 할당량 채우면 끝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창작을 연습할 때는 분명히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 없는 연습도 결과적으로 도움은 되지만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두고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작곡과에 다니며 학교에서 시키지도 않았던 카피를 열심히 했던 시절도 있습니다. 하이든부터 히사이시조까지 다양한 형태의 앙상블과 오케스트라 악보를 구입하여 연필로 카피를 했습니다. 당시에 음악노트 수십 권 분량을 카피했었는데 그 당시에도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악기들 그리고 긴 음악이 어떤 형태로 어우러져 있을까, 악장이 바뀌었는데 선행하는 악장과 모티브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언제 어디로 주제선율이 이동하고 대선율은 누가 연주하는가, 저 악기들 간의 음색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왜 저 악기는 쉬고 있는가 등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였던 것 같습니다.
음악은 분명 감성적인 예술이지만 철저히 논리를 따지기도 합니다. 저도 곡을 쓰고 발표를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제 작품을 돌아보면 부족하거나 쓸데없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논리적인 설명과 스스로에 대한 납득이 결여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실수를 줄여나가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도 24년 한 해 실수를 줄이고 목표를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