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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원 May 01. 2023

쉽게 작곡을 한다는 환상

연주자와 작곡가는 음악가라는 같은 분야에 속해있지만 음악을 공부할 때 배우는 방향이나 목적, 연습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저는 본래 연주자 출신이니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해 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재즈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흥연주 속에서 연주와 창작을 동시에 해내고 있으니 어쩌면 재즈의 세계에서는 연주자와 작곡가의 구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작곡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에 늘 따라다니던 고민 중 하나는 "나는 피아니스트만큼 연주를 잘하지 못하는데, 곡을 잘 쓰는 피아니스트는 왜 이렇게 많을까? 작곡가로서의 아이덴티티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이니 당연히 작곡을 하고 있지만 제 눈에는 모두가 곡을 쓰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피아니스트, 기타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반도네오니스트 심지어 드러머까지 발표하는 훌륭한 앨범과 곡들을 들으며 제 고민이 더욱 깊어져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매우 그렇다'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작곡가의 아이덴티티란 오케스트레이션과 편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두에 서술한 작곡과에서의 연습과 훈련방식은 주로 오케스트레이션과 제한된 상황에서의 편곡이 주를 이룹니다. 가령 하프를 반드시 포함한 실습이라던지, 첼로와 비브라폰으로 구성된 악곡을 만든다던지, 목관과 현악만을 이용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성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제한된 편곡을 연습합니다. 또는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 작곡이라는 주제로 한 번에 5도 이상 도약할 수 없는 피아노 곡 작곡 등을 연습합니다. 작곡기법이라는 수업을 전공필수과목으로 수강해야 하지만 사전적 의미의 작곡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머리와 마음에 떠다니는 선율을 쓰는 일,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연주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악기의 곡을 위주로 쓰고 대중음악 작곡하시는 연주자들은 평소에 연주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밴드 구성의 곡을 주로 작곡하게 됩니다. 물론 이분들 중에는 따로 공부를 하시어 각종 장르와 악기 편곡을 능숙하게 하시거나 훌륭한 오케스트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아직까지 큰 구성의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다양한 종류의 악기를 편곡하는 것은 작곡을 직업으로 삼은 직업작곡가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최근에 성인 작곡 수강생을 레슨 하며 왠지 모를 패배감에 젖었던 경험을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무엇 때문에 이런 절망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바라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오랫동안 배운 이력이 있으나 작곡을 배워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상황의 수강생의 레슨을 진행했습니다. 늘 그렇듯 우선 화성학을 수업했습니다. 4성부로 배치하는 방법과 금지된 진행 및 규칙 등의 개념을 설명하고 예제문제를 몇 개 같이 풀어본 뒤 문제풀이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예상했지만 당연하게도 제대로 풀어오지 못합니다. 다시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고 틀린 문제를 같이 풀어주며 해설을 곁들인 뒤에 또다시 문제풀이 숙제를 내줍니다. 동시에 두도막형식의 작곡법 수업을 병행합니다.


레슨 한 달 차가 지날 무렵 수강생이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돼요"라는 말을 합니다. "머릿속에서는 10곡정도 완성을 했으니 이걸 가지고 우선 곡을 쓰고 싶어요"라고 합니다. 우선 차분히 설득했습니다. 기초와 모방연습의 중요성에 대해 성토하고 곡의 형식과 구성에 대해 배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 시간이 더 흐르고 또다시 "너무 재미가 없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맞춰주기로 하고 그럼 우선 곡을 써와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머릿속에서 완성된 곡이 10곡정도 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머릿속에만 있으면 제가 들을 수가 없잖아요. 악보로 그려오시던 DAW로 음원을 만들어 오시던 일단 곡을 써서 보내주세요"라고 말씀드리고 다음 레슨을 기약합니다.


피아노곡 형태의 악곡의 악보파일이 메일로 도착했습니다. 작업실에 나가 시벨리우스 파일을 열어보니 음악적 내용은 둘째치고 기보법에 하나도 맞지 않는, 소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의 피아노곡 악보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다이나믹이나 아티큘레이션, 슬러 등의 악상기호가 없는 것은 물론 피아노를 오래 연주한 이력이 무색하게 피아노곡의 기보법이 무시된 상태입니다.


사소한 내용은 잠시 미뤄두고 곡의 구성을 살펴봅니다. 세도막형식으로 곡을 쓴 것 같은데, 각 구성에서 갖춰야 할 요건들이 모두 빠져있습니다. 동기의 활용, 대조, 전조, 코다 등이 보이지 않고 화성법 또한 엉성하고 종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형태의, 안타깝지만 너무도 기본이 안되어있는 작품입니다. 그래도 레슨을 해야 하니 곡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의 솔루션을 제공하며 수업을 진행합니다. 작곡에서 틀렸다고 말하기는 참 어렵고 위험한 일이지만 우선 제가 제공한 첨삭대로 진행됐을 때와 원래 쓰인 상태를 비교하고 들어보며 합의점을 찾아나갑니다. 다행히 비교하여 들려주니 납득을 하며 수정할 부분들을 체크하고 수업이 마무리됩니다.


다음 레슨을 며칠 앞두고 곡을 바꾸고 싶다는 연락이 옵니다. 이전 레슨 받은 곡은 수정하기 너무 어려우니 새로운 곡으로 들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도 한 곡을 끝까지 완성시키는 경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곡으로 마음을 정한듯하니 그렇게 하시라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3박자의 왈츠곡을 제출했습니다. 역시 첫 번째 곡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선율은 매우 아름답고 달콤했던 곡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이번에도 송폼에 대한 이해부재와 전조 및 화성진행 즉, 화성학 지식의 얕음으로 나타난 문제점들이 크게 들어옵니다. 특히 왼손과 오른손의 대위적이지 못한 진행은 귀에게 미안할 정도로 유치하게 들립니다. 슈만의 「어린이 정경」 악보를 뽑아주고 분석을 돕습니다. 화성 사용법, 선율의 대위적인 진행과 타성부에서의 동기 활용, 외성 간의 반진행이 만들어내는 입체감, B파트의 대조적 진행 등의 분석을 돕고 연주 연습을 과제로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슈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일축하니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높은 확률로 또 곡을 바꿀 것입니다. 이렇게 완성되지 못한 상태의 초고들이 쌓여가는 것은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닙니다. 프로를 지망하는 것은 아니니 충분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곡을 완성시켜 나가면 되지만 이런 경우 오랜 시간 동안 단 한곡도 완성시키지 못한 케이스를 너무도 많이 봐왔습니다.


제가 느낀 패배감이란 작곡을 쉽게만 하려고 하는 태도가 마치 제 직업과 제 일을, 더 나아가 저를 무시한다는 느낌입니다. 학창 시절의 또 다른 고민 중 하나는 쓸모없는 일을 한다는 열등감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 중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령 건물을 짓는 건축가 또는 건설회사가 없다면 우리는 쾌적한 주거환경에서 삶을 영위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라에 정치인이 없다면 혼란과 무법 속에 살아야 할 테고, 교육자들이 없으면 과거로 점점 회귀하며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멀리 보지 않더라도 주변에 중요한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일 아침 쓰레기를 수거해 가고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없다면, 또는 단 일주일만 파업을 한다면 들끓는 쥐새끼들과 악취 속에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에 비해 저의 전공과 직업은 없으면 삶이 심심하기는 하겠지만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조건이 아닌 일을 한다는 열등감이 저의 20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문학가들처럼 시대적 소명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곡을 하지는 않습니다. 왠지 그런 거창한 일은 저와 멀어 보이고 제 능력과 지식으로 판단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저는 왜 음악을 하고 있는지, 왜 작곡을 공부하고 곡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시작은 좋아해서였고, 전공을 택한 건 잘해서였고, 직업으로 삼은건 할 줄 아는 것과 해온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직업으로 삼은 이유치고는 무척 삭막하다는 것은 충분히 의식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진취적이고 의미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직 부족하지만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매일 공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학창 시절의 학교 과제, 외주작업, 앨범 발매 등 작곡을 할 때마다 쉽게 쓰인 곡이 단 한곡도 없다는 것입니다. 매번 꿈에서조차 괴로워하며 담배 수 보루와 커피 수 킬로그램을 소모해야만 겨우겨우 하나의 곡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취미로 악기를 배우시는 분들에게는 지루한 기본기 연습 없이 한 곡을 완성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음표 하나하나, 리듬 하나하나를 세어주며 같이 연주하면서 반복시키면 누구라도 한 곡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곡은 다릅니다. 취미로 곡을 쓰는 초보작곡가와 프로작곡가의 작업속도나 퀄리티의 차이는 발생할 수 있지만 곡을 쓴다는 행위에서는, 누구나 동일한 기본지식과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레스너로서 경력이 길지 않지만 처음으로 제 수업을 지루해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수강생을 만나면서 제 레슨 방식과 커리큘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의 결과는 지금까지의 제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직 뛰어난 레슨 선생님을 만나본적이 없어서 편협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상식에서 화성학도, 악식론도, 작곡기법도, 악곡분석도 공부하지 않고 곡을 쓴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저에게는 불가능한 방법이니 부디 뛰어난 레슨 선생님을 만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단지 음악이론에만 갇혀있는 건 창의성을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규칙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는 새로운 음악적 언어를 발견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기존에 이미 존재하는 작곡기법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런 부분에서 저는 얼마 전 고인이 되신 사카모토 류이치와 히사이시 조의 작품을 많이 참고합니다. 심히 변칙적이고 기존에는 찾아보기 힘든 방식의 화성법을 사용한 사카모토 류이치의 작품은 이상하다기보다 새롭고 짜릿한 울림을 느끼게 합니다. 쿠니타치음악대학을 졸업한 히사이시 조가 본인의 작품에 기존 화성어법을 따르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알고 일부러 비껴가는 것과 무지로 인해 틀리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기본은 곧 전부입니다.  


일본 음악학교시절 화성학 정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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