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가 3살쯤 되었을 때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나게 그네를 타던 아이가 무엇 때문에 골이 났는지 입을 삐죽거리며 내 옆에 앉아 잘 꼬아지지도 않는 앙증맞은 팔을 양쪽으로 꼬며 뾰로통하게 이야기했다.
"나도 할머니 두 개 있는데! 맞지? 엄마!"
할머니와 함께 놀이터에 나온 다른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나 보다. 더 정확히는 손주를 바라보는 따뜻한 할머니 눈빛이 부러웠던 것 같다. 양가 할머니를 두 개라고 표현한 아이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났지만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외로움은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도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이민자들은 한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서로에게 이모, 삼촌이 되어준다. 한인이 없는 알버타로 이주하며 고민이 많았다. 아이들이 또다시 우리뿐이라는 외로운 감정을 느끼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대가족을 만들 수 있었다.
낮은 울타리를 경계로 우리 옆집에는 80대 후반 로버트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손과 머리를 심하게 떠시는 할머니는 파킨슨 병을 앓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초기 치매 환자셨다. 할머니댁을 중심으로 반대편 집에는 우리 아이들과 동갑내기 남매를 키우는 스미스 가족의 작은 집이 있었다. 언니 오빠들이 등교를 하고 나면 양쪽 집안 막내 공주님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중간 지점인 할머니 뒷마당으로 모였다. 이곳은 아이들의 유치원이었으며, 재미있는 놀이동산이었다. 게다가 시종일관 관심과 사랑의 눈빛으로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었다. 따뜻한 햇빛이 언 땅을 녹이는 봄이 되면 로버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분주하게 텃밭을 갈고 콩 덩굴을 위한 지지대를 설치하셨다.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도 할머니가 배급해 주시는 작은 콩을 받으면 제법 진지하게 열심히 콩을 심었다. 콩이 주렁주렁 열리는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더 자주, 더 늦게까지 할머니 댁에 머물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얼마나 콩을 빨리 까먹는지 텃밭에 콩이 모두 없어질까 봐 겁이날 지경이었다. 겨울이 되면 알렉스 할아버지의 존재감은 빛을 더했다. 안전한 등굣길을 위해 새벽부터 눈을 치우시고 소금과 흙을 적당히 섞어 꼼꼼하게 도로에 뿌리셨다. 할아버지 손에 들려진 눈삽은 마치 포클레인 같았다. 밤새 내린 눈을 끌어모아 텃밭 한가운데 거대한 눈산을 만들어 놓으셨다. 이 산은 철저하게 계획된 할아버지의 프로젝트로, 아이들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완강한 경사와 스피드 있게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는 급경사로 이루어진, 3살 아이들에게 최적화된 눈썰매 장이었다. 즐거움에 가득 찬 비명소리를 듣고 있으면 설거지를 하다가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면 아이들은 할머니의 앤티크샵 같은 부엌에서 홈메이드 초코칩 쿠키와 우유를 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여름날 콩깍지 속 콩처럼 알차게 여물어 갔다. 아이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할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심해져 요양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정 하신 후, 할머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칩 쿠키 레시피라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다. 심한 손떨림으로 글씨 쓰기가 힘드셨을 텐데 편지지에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쿠키레시피가 적혀있었다. 가늘게 흔들거리는 할머니의 필체에서 정성 들여 적으셨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눈물 때문에 할머니의 필체가 더 흔들거렸다.
나에게 해외살이란 좋은 사람들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넓혀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오늘도 용기 내어 어눌한 영어지만 진심을 담아 내 마음을 전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