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일 다이어리
<Day 52> 11월 11일
아침부터 자욱한 안개는 저녁 늦게까지 걷이질 않았다. 오늘은 참전용사분들께 감사함을 전하는 캐나다 리멤버런스 데이다. 월남전에 참전한 아빠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서 기다려 오던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군화를 닦는다고 소란스럽다. 오랜만에 우리 다섯 식구와 아빠까지 모두가 함께 모인 아침이다.
행복하다.
아빠와 가슴에 퍼피꽃을 나눠달고 퍼레이드를 보러 타운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날씨 덕분에 기분 좋게 퍼레이드를 구경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의 국군의 날 행사와 비교하면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행사 규모에 상관없이 행사에 임하는 모든 사람들은 진심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아빠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야외 퍼레이드 이후, 모두 행사장에 들어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위한 헌화와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카뎃 아이들의 의젓한 모습에 행사장이 더 엄숙하게 느껴졌다. 앉을자리도 없이 꽉 찬 행사장 뒤편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섰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있어야 해서 조금 힘들긴 했지만 훌쩍 자란 늠름한 손주들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어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아빠의 민첩함은 절대 나이 들지 않으신 것 같다. 요리조리 사람들 사이를 오고 가며 동영상과 사진을 찍으셨던 아빠 덕분에 올해는 아이들 사진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들이 자신들만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이른 저녁을 먹고 가족들을 보며 기록을 남기는 중이다. 아빠의 손목과 손가락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 아마 무리한 실리콘 작업 때문일 것이다. 오늘부터 소염제를 드시기 시작했는데 건강하신 아빠가 관절염이라도 걸리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처음 오셨을 때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인천공항에 입국하셔야 할 텐데...
아빠가 밴쿠버를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아마도 우리의 시간적 상황이 계속 여의치 않음을 아시고 마음을 바꾸신 것 같다.
"난 밴쿠버랑 알버타가 가까운 줄 알았지! 이렇게 멀리 일박으로 다녀와야 하는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가려고 생각도 안 했을 거야."
우리가 부담스럽고 죄송스러워할까 봐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인의 섭섭한 마음보다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살피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이기적인 딸은 말씀 그대로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