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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Dec 27. 2022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

모스크바행 1

두 번째 열차는 밤 11시 기차였다.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한 지원과 보라는 지난번 경험으로 능숙하게 출력한 티켓을 역무원에게 내밀고는 칸에 올라섰다. 앞에서부터 제 자리를 찾아가던 보라는 저녁이라 조용할 거란 예상과 다르게 저번 기차보다 몇 배는 왁자지껄하고 어수선한 주변 환경에 어리둥절해졌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살펴보니 주변 침대칸들이 10대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칸 앞쪽에서 진두지휘하는 담당교사의 지침을 최대한 무시하며 장난 가득하게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지?”

“응. 기차 시간을 바꾼 게 잘못이었네.”



보라는 이 많은 청소년들을 직접 대면한 게 얼마 만인가 곱씹으며 기차칸이 소등되기만을 기다렸다. 소등 후 조용히 큭큭 거리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화장실로 향하며 주변 침대를 힐끔거렸다. 보라와 지원의 앞뒤 자리는 이제 중학생쯤 되었으려나. 앳된 말간 얼굴의 아이들이 주인이었다.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열차의 3박 4일은 소란스럽겠구나.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원했는데. 곤란하고 혼란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침대로 돌아와 수면 안대를 꼈다.



다음날 아침, 피곤한 상태에서 아침을 맞이한 지원은 화장실에 가려다 말고 잠시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잠도 없는지 아침부터 무리 지어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멀뚱히 서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던 지원을 눈치챈 아이들은 그제서야 보드게임을 멈추곤 같은 칸에 탄 낯선 이에게 경계심과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호기심을 저버릴 수 없어 지원은 제일 앞에 가까운 아이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러시아어는 못하니까 말을 걸어보고 대화 안 되면 깔끔하게 관심 끊고 가서 책이나 보는 거야.



“Hi sweetie, What’s your name?”

“보라야.. 나 벌집 건드린 거 같아.”

“너는 무슨 피리 부는 사나이냐. 이 애들을 다 몰고 오면 어떻게 해.”

“나 별말 안 했는데… 한마디 하면 대답은 열 마디로 돌아와. 얘네들 같이 상대해 줘 나 너무 벅차. .”

억울한 얼굴로 보라의 눈초리를 받던 지원은 머쓱하게 아이들을 살폈다. 러시아 10대 청소년들은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영어를 곧잘 했다. 그래. 소련의 냉전시대가 끝나고 세계화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산물이 바로 너희구나. 영어를 사용하는 게 재밌는 건지. 아님 친구가 아닌 타인이 말을 거는 게 신기했던 건지. 나서기 좋아하는 친구가 질문의 물꼬를 트니 소문을 듣고 삼삼오오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원과 보라의 침대 자리는 금세 북새통을 이뤘다.



알고 보니 이건 중-고등학교 합동 수학여행이었다. 아이들은 수학여행으로 모스크바에서 며칠 머무른다고 한다. 뜻밖의 동행을 만난 우리는 애들에게 모스크바에서 갈 만한 곳을 물어볼까 발칙한 생각을 하다 이내 접었다. 조금 더 지나니 더 건장한 고등학생들도 왔다. 소문이 거기까지 나진 않길 바랐는데. 대화의 주제로 장래희망을 물으니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낸다. ‘나는 선생님이요.’ ‘나는 모델이요.’ ‘얘는 과학을 잘하는데 수학도 좋아해요.’ ‘내가 쓴 시 보여줄까요?’ ‘나는 승마 배워요.’ 러시아의 교육제도와 학제가 궁금한 지원은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묻길 시작한다. 제2외국어는 뭘 배우니. 역사는 어디까지 배워? 세계사는? 대학교는 진학률이 높은가? 유학은 보통 어디로 가? 보라는 그런 지원을 보더니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다 애들이랑 정치 얘기도 하겠어.



지원과 보라의 정신연령이 10대 아이들과 곧잘 맞는 게 보였는지, 아님 둘의 보모 실력이 수준급이었는지 감독하던 선생님들도 금세 자기 좌석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거나 자기들끼리 게임을 했다. 눈치를 보던 보라는 돌아가는 선생님들을 보곤 황당해 하며 지원에게 속삭였다.

“보통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교사가 제지를 하잖아. 왜 우리랑 놀게 두는 거야?”

“애들 덩치가 우리보다 더 크잖아. 또래로 아는 게 아닐까. 우리… 누가 봐도 어른으론 안 보여.”

.

.

.

문명과 동떨어진 기차 안에서 다채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림 그리고 맞추기, 사진 찍기, 보드 게임, 미용실 역할놀이, 고등학생 아이들은 마술쇼에 노래와 춤까지 선보인다. 이 정도면 달리는 기차 위에서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한바탕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10대의 활력은 따라갈 수가 없어 아이들의 주위를 다른 데로 돌릴 것이 필요했다. 지원의 머릿속에 급히 스치고 지나간 것이 병실에서 포기한 키릴문자였다. 종이와 펜을 빌려 키릴 문자를 배웠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되어 두 명의 학생에게 최선을 다해 알려주었다. 보라는 우등생으로 곧잘 따라 했는데 지원은 여전한 낙제생이었다. 따라 하라며 알파벳 하나씩 발음해 주지만 발음할 때마다 혀끝이 입안에서 제멋대로 군다. 보라야 어렵지 않니. 아니 난 할만한데. 너 병원에서 공부 하나도 안했지.

식사시간이 되니 자리에서 본인이 가져온 음식들을 갖곤 다시 보라와 지원 자리를 제자리 마냥 앉아 식사를 한다. 식사시간에는 자리에 돌아가 예의범절을 지키며 밥 먹는 거라고 안 배웠나.라고 생각하다 이내 이들은 유교 문화권이 아니었단 걸 깨닫는다. 갈 생각이 없는 이 청소년들과의 눈치게임에 실패한 지원은 망연자실하며 구석에 찌그러져선 질문 로봇처럼 또 음식에 대한 질문을 한다. 아이들은 질문을 먹어보고 싶어한다고 받아들였는지 먹어보라며 너도나도 하나씩 음식을 준다. 지원의 앞접시가 음식으로 수북이 쌓이고 뭔지도 모르는 걸 입안 가득 받아먹은 지원은 우물거리며 보라에게 다음 정차역에서 과자랑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서 나눠주자고 속삭인다.



저녁에는 (드디어) 선생님들이 오더니 호명에 맞춰 아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Thank god! 을 외치며 지원과 보라는 열몇 시간 만에 본인 자리를 되찾음에 감동해 침대에 발라당 눕는다.

이번엔 20대 성인들이 찾아왔다. 포커를 알려주려 하는데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아이들한테 통역을 해달라 하기엔 불건전한 이 행실이 내심 걸렸다. 결국 포기하고 맥주 두 캔을 내리 마시곤 피곤하다며 서늘한 목소리로 내쫓았다. 아이들에겐 약하지만 또래에겐 가차 없이 구는 보라에게 엄지 척을 날려주곤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우리 기차에서 할 수 있는거 다 해본거 같아.”

“내일 또 오면 어떻게 해?”

“어디 도망갈데 없나.”

”다른칸 친구를 만들어야 돼.”

지원과 보라는 하얗게 불태운 모스크바행 기차 첫날을 곱씹다가 다음날 도망갈 계획을 세우며 금새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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