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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키 Nov 28. 2023

거침없이 하이킥.

 나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을 돌아보았다.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와 방향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여 썩은 냄새가 나고 있던 나의 무지함이 부끄러웠다. 주저 없이 공부를 시작했다. 

 코로나가 세상의 변화를 5년은 앞당겼다더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거대한 물살에 지금 올라타지 않으면 이번에는 ‘아날로그가 좋아’라는 핑계로 빠져나가기 힘들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부터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아이들 코딩을 가르치기 위해 사심을 가득 담아 시작한 컴퓨터 학원. 그곳에서 배운 간단한 상식을 가지고 아파트 전단에 붙어있는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SNS 마케팅 양성자 과정’에 지원서를 냈다. 18년 만에 다시 써보는 자기소개서와 면접 준비는 낯설고 두려웠다. 면접 당일 생각보다 많은 지원자에 놀랐고 이력서를 채운 빵빵한 스펙들에 나는 기가 죽었다. SNS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평가 시험은 고작 15문제였음에도 식은땀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질 만큼 어지러웠다. 어깨를 쫙 펴고 허리를 곧추세웠지만 자신감은 땅 밑으로 숨어버렸다. 이어지는 면접에서는 함께 들어간 파트너의 이력들이 머릿속의 공명이 되어 쾅쾅 울렸다. 고작 내가 그녀보다 어필할 수 있었던 건 어설프게 운영 중인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뿐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정답을 4문제나 못 썼어! 쇼... 쇼츠, 릴~스? 그게 뭐야?” 

 “하하하. 짧은 동영상 같은 거야! 괜찮아. 고생했어.” 

 수화기 너머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위로를 받고 전화를 끊었지만,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용기를 낸 첫 도전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나니 불타던 의욕이 꺾이면서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을 위기에 놓여버렸다. 

 답변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면접 때 만난 수많은 경력 단절 여성들의 준비된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SNS를 좀 더 파기로 했다. 혹시 연락이 온다고 해도 지금의 상태로는 따라가기 어려울 거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 두어야 다음번 도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분주한 아침이 가고 매일 하는 루틴 중 하나인 블로그를 기록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려서 여보세요, 하고 받았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여성인력 센터인데요. 이번에 지원하신 SNS 마케팅 양성자 과정에 합격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혹시 오전반과 오후반 어느 시간 때에 가능하실까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오전반이요. 감사합니다.”

 나는 겨우 답변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보이스피싱인가?, 잠시 의심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지원서를 낼 때 알아 두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직접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부터는 매일 4시간씩 100시간을 성실히 해내는 일만 남았다. 그 부분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미련할 정도의 성실함이 나의 유일한 무기 아니었던가. 10월 23일 아침 기다리던 첫 수업에 가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보이는 어느 색깔과도 잘 어우러지는 회색 정장을 세트로 입었다. 베이비핑크색 보스턴백에 개인 노트북을 지참하고 스니커즈를 신어 활동성 편한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스타일로 완성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나는 3기 오전반에서 나름 준비해 간 자기소개를 하며 첫날을 잘 마무리했다.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취업, 창업이 목적인 프로그램은 전반적인 마케팅에서부터 취업 준비를 위한 면접까지 다양하고 진행되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해서 집에 돌아와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도 디지털을 배운다는 게 즐거웠다. 전원 버튼을 겨우 켤 줄만 알았던, 타자도 못 치던 컴맹이 디지털 세상에서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나만의 컬러를 입히고 블로그에서 내 생각과 이야기를 공유하며 소통의 기본자세를 배우니 자연스럽게 아이들과의 트러블도 줄어들었다. 평안한 날들이 이어졌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만남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나는 디지털 세상을 받아들였다. 배우며 달라진 나의 세상 덕분에 나는 매일 놀라는 중이다. 틀에 박힌 학업을 꼰대처럼 강요하며 거기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해 걱정과 염려라는 잣대를 들고 비난을 멈추지 않았던 지난날이 몹시 부끄러웠다. 

 나도 이제 배운 여자다. 거대한 물살에 흔들리는 아이들이 아니라 거침없이 항해하며 방향을 찾아갈 4남매를 응원할 준비된 엄마로 성장 중인 것이다. 

 언제가 TV 프로그램에서 ‘장기하’라는 가수가 이런 말을 했다. 

 “두각을 나타내고 싶었는데 남들이 이미 다하는 걸 하면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경기를 내가 만들었어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니까 당연히 내가 위너죠.” 

 소신 있게 말하는 그의 진심이 내 심장을 강타했다. 외로운 길이 될까, 걱정했었다. 남들과 달라 보일까 봐 두려웠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그저 조용히 숨만 쉬라며 아이들 가슴에도 대못을 박고 소리쳤었다. 

 나는 나를 거침없이 뻥 차 버렸다. 이제 더는 울지 않는다. 더 큰 태풍이 쓰나미처럼 밀고 들어온다고 해도 나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릴 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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