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만 모이는 곳이라 사연도 많고 사건도 많다. 언니 동생 하며 세상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다가 이년 저년 싸우고 끝내는 패를 나누어 서로를 헐뜯으며 어느 날부터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들어오고 나간다. 몇 년 단골도 한순간이다. 10년 넘게 고비를 넘겨 온 창립 멤버도 예외 없었다. 소문은 의심을 낳아 사소한 오해에 불씨를 댕겼다.
몇 년 전 바뀐 때밀이 이모 사건 때가 그랬다. 알코올 중독 남편의 폭언과 폭행 속에서도 이모는 꿋꿋이 버티며 아들이 변호사가 될 때까지 뒷바라지했고 하늘이 복을 내렸을까, 넉넉한 집에서 사랑받고 잘 자란 착한 변호사 며느리도 얻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와 모두에게 떡을 돌렸고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해 주었다. 허나 누군가에게는 배알이 꼬여 못된 심보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2인 2조로 움직이는 파트너는 오랜 세월 함께 한 시간이 가족보다 길고 믿음은 깊다. 그러나 여자의 질투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아니 아들 며느리가 잘나가는 변호사면서 지 엄마가 이 일을 계속하게 냅둬?”
“돈독이 올라 아들 말도 안 들어.”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 보기 싫다고 집에도 안 온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아픈 상처는 더 깊게 후벼 파헤쳐졌다. 안 그래도 작고 왜소한 이모는 부쩍 더 말라보였고 원래도 없던 말수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한순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린 짝지는 사장님이 나설 때까지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쫓겨 나가는 순간까지 억울하다 고함을 치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우리네 치욕스러운 민낯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는 사장님이 건네는 맥주 한 캔을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손님을 받았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커다랗게 구멍 난 마음을 맥주 한 잔으로 누르고 삼키며 견디는 그 마음의 깊이를 누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샤워장에 들어가니 이모는 평소와 다른 방향에서 손님을 밀고 있었다. 차마 비어버린 옆자리를 보고 밀려드는 허무함을 마주할 수 없었을 거라 짐작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상처의 가해자는 언제나 내가 믿었던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너와 나의 적당한 온도 거리는 과연 몇 도일까.
코로나의 여파는 소상공인에게 직격타를 날렸다. 사람이 많이 모여야 돈 버는 곳에 떨어진 모이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2주, 때로는 한 달씩 문을 닫았다. 나도 발길이 점점 뜸해졌고 가끔 ‘영업해요’라는 문자를 받아도 가지 못했다. 한참 뒤 다시 찾았을 때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24시간 운영하지 않았고 때밀이 이모 두 명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들고 나는 사람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34년 전 한증막 사장님의 남편이 직접 땅을 골라 사고 손수 나무를 베어 이 막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언젠가부터 막 안에서는 소나무를 빙 둘러 은은하게 베인 솔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는다. 늘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 것이라지만, 터줏대감들의 뒷이야기와 푸념이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쉬운 마음을 거두기 어려웠다. 그렇게 사람이 넘쳐나 앉을 자리가 없고 주차하기도 힘들었던 찬란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곳곳이 낡아 매일 고쳐야 할 곳들이 생기는 골칫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급기야 사장님은 사우나를 헐값에 넘기겠다며 마땅한 주인을 찾아 나섰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임자가 나타날 리 없었다.
마지막 떠나는 길 남편이 젊고 예쁜 아내에게 선물처럼 남긴 이곳은 점점 초라해져 갔다. 떠나버린 마음 때문인지 사장님도 생기를 잃어갔다. 매일 조금씩 초췌해졌고 피곤함이 가득 묻어 나는 우중충한 그림자를 달고 살더니 몇 년 사이 팍삭 늙어버렸다. 그 모습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고 이후 사우나 안에서도 자주 사장님의 이야기가 오르내렸다.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북적거리며 정을 나누던 곳은 까칠한 사람만 남은 건지 세상이 팍팍해진 탓인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눈총을 받아 더 이상 편한 곳이 못 되었다. 나도 이렇게 바뀌었으면서 이곳의 정 없어진 변화가 못내 속상하고 씁쓸했다. 이제는 아주 가끔 이모들이 문득 보고 싶을 때 따뜻한 두부 다섯 모를 사 들고 다녀오는 정도로 가벼워져 버렸지만, 그곳의 전성기 시절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