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엔 두 달 치 일기도 하루 만에 썼다. 기억이 나서가 아니라 이벤트가 별로 없고 일상이 거의 비슷해서였을 것이다. 일어나서 놀고먹고 자고, 그러다가 가족들과 어디를 가는 그런 정도의 일상이었으니 두 달 치를 한꺼번에 쓴다 해도 날씨만 맞다면야 별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미친 듯이 일기를 썼다. 하루에도 너다섯번을 쓰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그 시절엔 일기장에 작은 자물쇠를 달 수 있어서 나만의 비밀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나의 인생, 진로, 가치관, 그리고 나의 고민들. 모든 것을 안전하게 지킬 수가 있었다. 애지중지 보물처럼 끼고 다녔던 일기장이 까였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교 후 책상 위엔 자물쇠가 뜯긴 일기장 수 권이 책상에 놓여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했겠지만 애써 묻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일기장들을 마당으로 가지고 나와 한 장 한 장 찢어 밤새 불에 태웠다. 오늘처럼 공기가 찬 겨울밤이었던 것 같다.
그때 결심했다. 다시는 기록하지 않으리라 하고서 말이다. 뇌 속에 기록하자고 하지만,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은지도 오래고 일기를 쓰지 않은지도 오래다. 그저 중요한 순간들을 몇 글자 끄적여놓은 것이 다이지만, 이제부터는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애써 생각해야 기억이 희미하게 나니 말이다. 기억력이 약해져서라기 보단 수많은 정보들이 뇌에 가득 차있기 때문에 쉽게 생각이 나지 않은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면서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도 하고, 지난 시간들을 추적해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갔던 길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 좀 더 성장한 모습으로 인생길을 갈 수도 있다. 잘 빚어진 도자기처럼 내 인생의 형상을 다른 시각으로 빚어볼 수도 있다. 오늘은 일기를 브런치에 쓴다. 내가 밉다고 등을 돌리고 인연을 끊자던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그럴 거라 생각했고 놀라운 일도 아니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내게 무엇이 그리도 서운한 것인지 한참을 또 쏟아내고 다시 또 일방적으로 말문을 닫는다.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생각을 한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일까? 한마디 말을 하면 백 마디로 쏘아붙이니 난 말을 섞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을 한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 일기장엔 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쓸 것만 같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잡을 수도 없고 잡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세월 지나 생각이 문득 걸려오면 그땐 미안하다 하겠지… 그래도 그런 그녀를 미워하거나 야속해하지는 않는다.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기에 그녀의 아픔에 마음이 베인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때를 쓰는 것만 같다. 억지를 부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다. 왜일까? 아마도 가치관이 너무 달라서 일 것이다. 아무리 가까워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다. 그녀는 그 선을 넘었다. 애써 외면해 왔지만 결국 그녀는 선을 넘어 너무도 깊게 내 인생에 관여를 하고 더 나아가 통제하고 싶어 했다. 친구니까. 나를 아끼니까 말이다. 그것이 그녀의 이유였다. 안다. 그녀가 얼마나 나를 아끼고 나를 위해왔는지.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철학이고 나의 인생은 역시 나의 인생이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교만이 되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너무 겸손한 것이다. 그러니 중도를 잘 지켜야 한다. 어린 시절 인생의 가치관과 어른이 된 지금 가치관은 많이 달라져있다. 내가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지금의 나를 본다면 지금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영원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다만, 큐브를 맞추듯 그 완전함을 향해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큐브를 맞추는 공식은 없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실행해 보는 것, 그리고 틀렸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는 것, 그래서 완성하는 것. 이것이 아닐까?
세월이 지나 그녀가 다시 날 찾아온다면 난 오늘 쓴 일기를 보여주고 싶다. 그래도 내 친구이자 그녀를 아끼니 말이다. 그녀의 진정한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