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수 없는 순간에도
살아왔던 흔적이 삶을 쓴다
주말이다. 뉴스에서 한파주의보가 내려 마음을 졸였던 탓인지 생각보다 포근한 날씨에 가슴을 쓸어내려본 날이다. 묵직한 햇살이 24K금처럼 순전하게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쪼이는 오후, 길을 거닐며 오전에 보았던 한 어르신을 생각해 본다. 오전에 어르신들이 머무시는 시설에 잠시 봉사를 다녀왔다. 딱히 할 줄 아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식사 보조를 해드리고, 움직이실 때 휠체어를 밀어드리는 정도의 도움을 드리고 있다. 눈에 띄게 고우신 어르신이 계신다. 치매가 있으시지만 세련된 옷차림에 깍듯한 경어를 쓰시는 지성미가 있어 보이는 어르신이다. 늘 뒷짐을 지고 걸으시거나 앉으실 때 조심조심 앉으셔서 그저 허리가 아프신가 했다.
"아무리 치매에 걸려도 살아온 지난날의 흔적을 속이진 못해요. 곱게 살아오신 분들은 치매에 걸리셔도 행동이 거칠지 않아요. 그런데 거치신 분들은 대부분 살아온 삶이 그러셨더라고요. 살아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행동에 남거든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고우시죠? 그분 정말 얼마나 깍듯하신지 몰라요. 할아버지가 경찰서장을 하셨데요. 기억을 잘 못하시는 게 안타깝지만 그래도 정말 곱게 늙으셨어요. 다만, 손주 셋을 키우셨는데 지금도 손주가 등에 업혀있다고 착각을 하시는 게 가장 마음이 아파요"
아, 그랬구나 싶었다. 지금도 손주가 등에 업혀있다고 생각하시니 늘 아이를 업는 자세로 걸으시고, 앉으실 때도 아이가 다칠까 조심조심 앉으신 것이다. 어르신의 기억 속에는 손주를 돌보실 때가 가장 행복하셨을까? 그래서 당신 몸도 성치 않으신데 아이를 등에 업고 계신다고 느끼시는 걸까?
그래도 그 기억이 어르신의 행복한 한편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어르신이 마음 따뜻하게 웃을 수 있다면 말이다. 치매가 아니더라도 일상을 마치고 밤에 자리에 앉았을 때 좋은 것들만 떠오른다면 그래도 행복이다. 그렇지 않은가? 존재하기 위해 움직인 탓에 일렁이든 흙탕물이 가라앉고 나면 맑은 물이 보이듯 그렇게 매일매일을 정리한다면 일상이 행복이겠지?
어르신들의 모습 속에 내 모습도, 우리의 모습들도 다 들어있다.
삶을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언제나 숙연해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주변에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더 나눠야지 하는 그런 마음이 차오른다.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아냐고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주고 또 주어도 늘 부족한가 싶은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았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안다. 희한도 하다. 줄수록 더 주고 싶은 마음은 왜 인 것인지...
맑은 바람, 햇살, 그리고 저 달과 별에 마음과 생각을 말갛게 씻어본다. 여름에 본 달, 별과 겨울 별, 달은 참 다르다. 청명하기 그지없다. 한 해가 정말 스물스물 끝을 향해간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마음의 무릎을 꿇고 조용히 나를 비추어본다. 걸어온 길, 놓친 것들, 그리고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리고 감사와 사랑의 고백을 드린다. 존재의 모든 것에 대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