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안 좋은 생각만 하고 안 좋은 얘기만 하냐고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면, 나도 궁금하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불행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기억력이 좋다. 기억력이 좋은 이유로 살아가면서 편리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많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은 나는 불행 역시 오래도록, 어김없이, 또렷이 기억했다. 사람은 좋은 추억보다 안 좋은 추억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던데, 이런 단서들은 그나마 내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는듯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주말이다. 살짝 무기력하기도 하다. 내가 살아온 시간, '나는 마음 편히 힘들다는 말 한번 하지 못하고 지냈다.' 힘들다는 말, 우울하다는 말로 누군가 나를 떠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우리 언니가 그랬다. 누군가는 가족이란 떠나갈 수도 없는 사이라 생각하겠지만, 언니의 차가운 말투는 나를 바다 위 외로운 작은 섬 위로 떠밀어보내는 듯했다. 거절을 당할 때마다 마음이 시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내가 아플수록 엄마는 나를 사랑했으며 내가 아플수록 언니는 나를 미워했다. 언니가 나를 미워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 나이 8살 정도에 서로 갈 길을 달리하자며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는데, 언니는 그런 떠나간 아빠를 쏙 빼닮았었다. 행동에서 얼굴까지 아빠를 닮은 언니는 나와 달리 아빠를 추억 속에 담아 좋아하기도 했다. 아빠와 이혼하고 홀로 언니와 나를 지켜야 했던 엄마는 아빠를 미워했다. 엄마는 아빠를 원망했다. 365일 일 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하고 몸아 부서져라 일했던 엄마는 한편에선 일 년 중 많은 날들을 원망하며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엄마에게 남기고 간 것은 아이 둘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보증이었다. 한때는 아빠도 열심히 일을 하고 회사의 사장이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리를 다치면서 사이비 종교에 빠졌고, 교주를 만나는 날이 아니면 아무 일이 없는데도 어김없이 밤낮이 바뀌는 생활을 계속했다. 사실 아빠는 원래도 지독히 게으른 사람이었다고 했다. 아빠가 죽은 뒤에 엄마는 나에게 아빠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아빠는 어린 시절 중학생 무렵 아빠의 삼촌 댁에 가서 일을 도와 용돈을 번적이 있다고 했다. 아마 삼촌댁이 쌀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침에 나와서 일해야 하는 일꾼이 잠만 자느라 일을 하지 않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에 일어나는게 태반이었다고 했다. 아빠의 삼촌은 한마디 하셨다고 했다. "게으른 녀석, 그래서 어디 벌어먹고 살겠냐?" 아빠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삼촌을 싫어했다고 들었다.
아빠를 좋아했던 언니는 아빠를 닮아 잠이 많았다. 엄마는 아빠의 지독한 게으름을 지독히도 싫어했는데, 엄마가 낳은 언니 역시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아빠가 떠난 후에도 언니와 엄마의 싸움은 끝없이 계속됐다. 잠이 많은 언니는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랬다. 지금은 따로 살고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회사에서 잘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도 있었다.
나는 눈치 빠른 아이였고, 엄마가 게으른 아빠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니가 잠자느라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에는 그날에라도 '집이 풍비박산 나도 할 말이 없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작은 소리에도 번쩍번쩍 일어나는 잠귀가 밝은 아이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가 잠귀가 밝아질수록 언니와 멀어져 갔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병적으로 부지런하고 예민하게 살아온 이유는 엄마에게 미움받기도 싫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버려질지 모른다는 어린 시절 타고 있던 가느다란 줄 위에 큰 불씨를 끼얹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버려지고, 가족이 박살 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불타 없어질 거라는 불안이 뼛속 깊이 나를 엄습하곤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의 싸울 때마다 나를 나의 불안은 끝없이 커져갔고, 언니가 혼날 때마다 잔뜩 예민해진 나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았다. 언니와 나는 점점 멀어져 갔다.
언니는 그렇게 30년 가까이 나를 열렬히 미워했는데, 우리 가족은 서로 날이 선 마음과 얼굴 앞에 힘들다 말 한마디 할 사람이 없던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 가족이 모두 그랬다. "힘들다"라는 말을 들어줄 사람도,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아직도 누구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 그렇게 누군가 떠나갈까봐 ‘힘들다는 말’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