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족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다. 우리 집에는 가족사진을 찍을 돈도 없거니와, 가족사진을 찍으러 갈 만한 시간도 없었다. 아빠가 떠난 후 남긴 건 빚뿐이었고, 남겨진 우리 세 가족에게 남아있는 거라곤 남겨진 빚으로 있는 돈마저 나갈 일뿐인 깨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현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드는 게 흔했다. 방학 전후로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는데, 나는 그때마다 가족사진이 없어서 애를 먹곤 했었다. 가족 신문을 다 만든 후에는 투표에 부쳐 누가 제일 잘 만들었는지 겨루기도 하고, 담임 선생님이 잘 만든 신문을 뽑아 자랑스레 게시판에 붙여주기도 하셨다.
같은 반 아이들이 만든 신문에는 항상 가족사진이 붙어있었다. 같은 반 아이들의 신문에는 네 가족이 모여 사진관이든 공원이든 화목하게 찍은 사진을 자연스럽게 붙이고는 했는데, 우리 집은 그럴만한 사진이 없었다. 붙일 사진 한 장, 써 내려갈 추억 하나 없이 내 손으로 어렵게 어렵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나가야만 했다. 남들도 다 있길래 나도 한 번 정해본 우리 집 가훈은 가화만사성, 화목이었다. 그러나 실상 우리 가족에겐 화목하게 모여있을 만한 시간도, 화목할 가족 구성원도 없었다.
엄마 아빠가 쌍방으로 맞지 않아 헤어졌다거 했다. 그저 가만히 받아들이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나는 스스로 남겨지고 버려진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안다고 했던가, 화목한 가족이 부럽지는 않았다. 화목한 가정이 어떤 것인지 그거 감으로만 알뿐 실제 어떤지도 몰랐으니. 내가 아빠를 안아 본 것은 단 1년도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추억할만 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마저 기억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아빠에 대한 기억이 없는 상태로 어른이 되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고 이 일은 나에게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뭐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쩌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있는 가족사진을 가지지 못한 것이 나의 한이었고, 우리집은 그만한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을 때 마다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가족신문의 섹션은 여러 카테고리로 나누어 발행자가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었다. 가족들이 함께한 추억을 적거나, 엄마 아빠 동생 누나 등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란도 있었다. 가족신문의 규격은 4절지였다. 누군가에게는 공간이 부족하다 느껴질 수 있는 4절지가 나에겐 너무나 넓었다. 그 넓은 공간을 혼자 꾸미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나는 가족신문을 만드는, 그 넓은 공간을 꾸미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할 수도 없기에 없는 이야기로 지어내야 하는 하는 상황은 매 학기 매 학 년 나를 거짓되게 만들었고 나 자신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내가 거짓을 쓰고 있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가장 위쪽에는 모여서 결의를 다질 수도 없는 가훈을 적었고, 함께 모일 가족과 시간도 없으면서 가족회의를 한다는 거짓을 적어나갔다.
그렇게 20년이 넘은 지금도 아직도 여전히 나 혼자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참으로 버겁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 많이 경험하고 즐기라고 한다. 사람은 추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나에겐 앞으로 헤쳐나갈 일에 대한 두려움을 보듬어줄 추억이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맞닥뜨리지 않아도 그림자만 보고 두려움에 매일 떠는 나였다. 부서진 울타리 안에 있는 양 무리 중, 의지할 것이라곤 희미하게 내려오는 달빛뿐인 새벽에 늑대의 사냥감이 될까 두려움에 떠는 밤을 보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