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없을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 2학년 즈음까지, 우리 가족은 빨간 벽돌로 지어진 빌라에 살았다.
2층 204호.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아빠가 일하고 보수 대신 받은 것이 바로 그 집이었다. 내 기억 속에 아빠는 거의 없다. 떠오르는 기억이라 하면 세 개 정도의 장면뿐이다. 아빠가 빨간 벽돌 집에 들어와서 돌아다녔을 때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이 키가 컸다는 것과 그걸 보고 놀란 나.
다른 한 장면은 나와 엄마, 언니를 두고 간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왔던 날의 기억이다. 나와 언니를 지하상가에 있는 옷 가게에 데려갔다. 맘에 드는 옷을 고르라고 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나는 쭈뼛쭈뼛하며 맘에 드는 것을 바로 집지 못 했던 게 마음이 언짢은 채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빠는 수리남이라는 나라에 집과 차를 사 놓았다고 했다. 지금에야 추측해 보는 것인데 아빠가 돌아왔을 당시 수리남으로 이민을 가자고 했던 때가 2002년쯤 되는 걸로 보아 우리 아빠는 넷플릭스 영화 '수리남'에 마약 바지 사장으로 연루될 뻔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빠는 수리남에 같이 가서 살자는 얘기만 남긴 채 또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그랬다. 아빠가 나와 엄마와 언니와 함께 어딘가로 데려갔다. 가는 길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도착한 곳은 모텔이었다. 처음 보는 독특하게 생긴 원형 침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세상이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침대가 다 있네." 나중에 언니가 해준 말로는 아빠는 나와 엄마, 언니가 있는 집을 두고 떠난 채 본인의 몸을 둘 곳이 없어 모텔에 취직하고 숙식을 해결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아빠가 있던 방은 비어버린 채, 한구석은 언니가 나를 때리는 곳 그리고 그 너머에 방 끝에 베란다에 나만의 화원을 만들었다. 식물을 좋아하던 나는 빨간 벽돌집 아빠가 떠나고 남겨진 방 안쪽에 있는 베란다에 나만의 화원을 꾸몄다. 타일 사이로 드문드문 먼지벌레가 기어다녔다. 빗자루로 쓸고 물을 뿌린 후 따사롭게 들어오는 햇빛에 베란다의 검녹색 타일을 말렸다. 내가 사 온 작고 귀여운 화분들을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에 물기가 다 마를 새도 없이 은박 돗자리를 깔았었다. 돗자리 위로 팔다리를 뻗어 누워있으면 주변에는 미모사, 아이비, 히아신스 내 맘에 드는 녀석들로 골라온 화분들이 줄지어 보였다. 베란다 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