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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msoom book Jul 12. 2023

다섯 살 난 아이의 벗겨진 신발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도 내가 가고 싶다는 학원은 어김없이 보내주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 엄마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아이 둘을 키워야 했다고 말했다. 언제나 우리 집이라 하면 엄마와 언니, 나 셋뿐이었다.

 2019년 즈음 아빠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원망도 추억이 있고 기억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제대로 된 원망도 하지 않고 살았으니. 2019년 여름 즈음이었을까, 법원에서 우편 한 통이 찾아왔다. 1900 몇 년도에 아빠라는 사람이 대부 업체에 빌린 돈은 값지 않고 죽어서, 그 빚을 우리한테 갚으라는 통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몇십 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빠라는 사람이 빌린 돈에 대한 채무가 있으니, 그 대가로 나와 언니의 통장을 압류한다는 강제집행 명령서였다. 살면서 처음 보는 편지와 처음 들어보는 말들뿐이었다. 대략 30년 전, 아빠라는 사람이 엄마의 명의로 지고 간 빚은 돈을 빌릴 줄도 모르던 순진한 20대 여자를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 그렇게 엄마는 빚이라면 몸서리를 쳤고, 본인 명의의 휴대폰 하나 개통할 수 없어 친구와 할머니의 명의를 빌려 써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남겨준 것 하나 없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떠나간 기억에도 없는 아빠라는 사람은 죽어서도 빚을 남기고 갔다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얼굴 한 번 보고 밥 한 번 사주는 일이 없다며 아빠를 미워하던 엄마는 더 이상 미워할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에 크게 허망해 했다.


자세히 알지 못했던 아빠의 이야기.

내가 한 살이었을 무렵, 아빠는 사이비 종교에 빠졌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갈 길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내 인생에 가족은 셋이었고, 불완전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신적 없이 나를 옭아맸다. 아빠는 원래 건축물에 소방설비 점검과 설치를 하는 사장이었다. 30대 초반에 이미 회사 직원이 10명이나 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아빠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고 다리 한쪽을 다치게 되었다. 그렇게 몸 여기저기가 아파 치료를 받던 중, 당시 친할머니가 다니는 사이비 종교에 함께 빠져버렸다. 친할머니도 원래는 사이비 종교 같은 건 모르고 사는 그저 평범한 분이셨는데,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시더니 그 끝에는 병원이 아닌 사이비 종교로 빠지고 마셨다. 교주가 기도를 해주고 아픈 부위를 만져주었더니 몸이 안 아프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빠도 교주의 말과 기로 자신의 통증을 치료하고 싶어 했고 서서히 깊이 그곳에 빠져들고 말았다. 늪과 같았다.

 늪에 같이 빠져들자고 그 늪에서 남은 세식구를 당겨 빠져나지 못하게 잡고있던 적도 있었다. 우리 네 식구는 사이비 교주와 그의 부인이 있는 용인에 가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내가 두 살 무렵, 어떻게 된 건지 나는 혼자 빗을 가지고 놀다가 꼬리빗의 꼬리를 입에 물어 목구멍을 찔리고 말았다. 감염이 된 건지 아무튼 많이 아파서 끙끙 앓고 열이 펄펄 났다고 했다. 그런데 아빠는 어린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약을 먹일 생각은 전혀 없이, 2살 밖에 안된 아이를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그 안에 넣은 채 부적을 붙이고 기도만 했다. 교주의 기도가 나를 낫게 할 것이라고 했다는 얘기를 내가 다 크고 나서야 엄마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열이 펄펄 끓는 나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엄마는 새벽에 그곳에서 탈출해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아이를 이렇게 두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탈출을 감행했다고 했다. 당시 전혀 개발이 안되었던 용인. 숲이 우거진 그곳에서 두 살 된 아이는 등에 업고 다섯 살 난 언니는 신발을 신겨 작은 걸음을 재촉했다고 했다. 저 멀리 트럭에 두부를 싣고 오는 두부 장수의 차가 절박하고 긴박했던 엄마의 두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손을 들어 저기 시내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교주와 교주의 부인, 그리고 아이 둘의 아빠라는 사람. 그들에게 지금 붙잡히면 두 살 난 아이도 죽을 뿐만 아니라, 구타를 당하고 이성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 것이라는 게 훤했다. 엄마는 필사적이었다. 다섯 살 난 언니의 신발이 벗겨진 줄 모르고 한 손으로 붙잡아 아이의 팔을 당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로 아빠는 거의 볼 수 없었는데, 같이한 추억이 없어서 인지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외할머니가 해준 이야기처럼 '아빠 없는 자식'이라는 이야기를 귓속말로 주고받는 어른들이 있을까 봐, 어린 시절 내내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기 위해 예의가 아닌 바쁘게 눈치를 보며 미움받지 않기 위해 분투하며 살았던 기억이 난다. 사이비 교주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당신은 자식들과 연이 없다." 그 교주는 아빠를 놓치지 않고 싶었던 걸까? 2002년 전후로 엄마와 아빠는 이혼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실랑이를 끝냈고, 엄마는 이후로 평생을 쉬지 못하고 일만했다. 엄마의 진한 피와 땀으로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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