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식물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식물에게 물을 잘 주며 키우시다가도 이파리가 너무 길게 늘어졌다던가 자라는 모양이 마음에 안드는 식물은 그 잎을 가위로 잘라버리기도 하셨다.
아빠가 떠난 후로 나는 내내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까 봐 거의 항상 웃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답답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집 떠나 다른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할머니 댁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은 친척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가야만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 시절 할머니 댁은 달동네였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크고 멋진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달동네라 그런지 이웃 간에 담장이 높지 않았고 땅따먹기나 멀리뛰기 한 판 하자고 부르면 온 동네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뛰어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친척은 두 집식구가 모여 아이들만 5-6명이 기본이었는데, 때때로 엄마가 일 때문에 바쁜 날이면 언니와 나만 할머니 댁에 가있는 경우도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언니와 나 셋이 있거나, 할머니와 나 둘이 있을 때면 종종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할머니는 계란후라이 하나에 무짠지, 오래된 무김치를 지진 물컹한 김치찜을 작은 소반에 차려주며 엄마 말씀을 잘 들으라던 가, 엄마한테 잘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드문드문이었지만 10년이 넘게 계속하셨다.
밥을 차려주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차도 기름을 넣어야 가지, 그냥 두면 가냐. 엄마가 나가서 버니까 너희가 사는 것이야." 이번엔 식물에 물을 주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식물을 그냥 두면 살겠니? 물을 주니까 사는 거야. 너희가 엄마 아니면 어떻게 살겠니." 비참했다.
엄마가 없으면 나는 끝이구나.
물을 받아먹은 식물은 어느날 양쪽 잎이 댕강 잘려나갔다. 식물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뿌리 식물로 뿌리 위로 30센티가 넘는 이파리가 6개 정도 자라는 녀석이었다. 모양은 마치 분수의 물줄기가 뻗어 나오는 것같이 생겼는데, 그 6개의 이파리 중 양쪽으로 가장 긴 두 개의 잎이 잘렸다. 잘려있는 부분을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웠다. "나도 잎이 잘리는 신세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돈을 아끼시느라 컴컴한 동굴같은 어둠에서 TV만 켜고 지내시던 할머니 댁에서 이틀을 보내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집 앞 정류장에 내리는 건 어린 나에게 상당히 겁나는 일이었다. 그때 당시 정류장 이름을 알려주는 방송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눈으로 계속 보면서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집에 도착한 나는 혼자였다.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일을 하러 가느라 집에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항상 소고기 미역국이나 소고기뭇국을 거의 매일 끓여주셨고, 어릴 적부터 허약한 나를 위해 가슴 앓이를 하며 잘 입히고 먹여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3-4학년쯤이었을까 엄마는 고작 36살이었다. 무일푼으로 아이 둘과 본인을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엄마는 너무나 버겁고 겁이 났는지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만약 엄마가 죽으면, TV 밑 검정 서랍에 보험 서류 넣어놨으니 그거 가지고 가서 돈 달라고 해." 엄마는 몇 년이나 위장약을 달고 살았고, 나는 엄마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당장 내일이라도 팔다리가 잘려나간 식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흘러 외할머니는 경증 치매와 함께 거동이 불가능해지셨고 요양원으로 가게 되셨다. 더 이상 좋아하는 식물을 키울 수도, 원하는 데로 식물을 다듬어 자를 수도 없게 되셨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를 보면 속이 메스껍고 불편하다. 불효자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리 엄마는 함께 문안을 가지 않는 나를 야속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앞으로 할머니를 볼 수도 안을 수도 없을 것 같다. 내 양쪽 팔은 식물을 좋아하시던 할머니의 가위로 잘려나갔고, 그 끝은 어린 시절 바싹 말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