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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Dec 11. 2020

만약에 내가 OO이라면

가끔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대개 둘 중 하나다. 다양성 영화 아니면 히어로 영화. 주변에 다양성 영화를 좋아하는 친 구들은 히어로 영화가 너무 상업적이라 싫다고 하고, 히어로 영화 마니아들은 다양성 영화가 이해하기 어려워서 별로라고 한다. 그 사이에서 나는 박쥐가 된 기분으로 조용히 앉아 있는다.


히어로 영화가 좋은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영화 속 캐릭터가 나를 엄청나게 고무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다. 영화를 본 다음날부터 갑자기 아침 조깅을 시작한다거나 운동 센터에 등록한다. (나는 운동을 대부분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고 장을 잔뜩 본다거나 영양제를 과다 구입한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강해지고 싶으니까, 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싶으니까.


최근 넷플릭스 서비스를 이용하고 난 이후로, 내가 인물 다큐멘터리를 보고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히어로 영화와 비슷한 효과다. 다만 인물에 따라 행동이 좀 달라진다. 갑자기 새벽부터 일어나 독서 를 두 시간씩 한다거나, 옷방에 있던 옷을 싹 다 끄집어내서 카오스를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고 보면 나는 열 살 남짓부터 만화 속 주인공을 따라하길 좋아했던 것 같다. 만화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 에는 여주인공인 유키노가 남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운동하고 공부하는 장면이 나 온다. 새벽 다섯 시부터였나? 여섯 시부터였나?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동생과 내가 그 패턴을 열심히 따라했던 기억이 난다. 그학기 성적은 아주 좋았다. 포인트는 단순했다. ‘마치 내가 유키노가 된 것처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너무 단순해서 유치해 보이는 행동 패턴이지만 요즘 종종 그걸이용해서 ‘빙의’를 한다. 대상자는 영화 속 히어로나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이다. 물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벤치마킹 해야 할 만큼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라도 나보다 월등히 나은 점, 혹은 내게는 없는 좋은 부분이 한두개는 꼭 있다.


이 시도의 첫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애인(지금은 남편)이었다. 나는 어떤 일이든 고심하고,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편이다. 뭔가 실수를 하면 거기에 사로잡혀 있기 일쑤고, 기분이 망가지면 그냥 주저 앉아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애인은 그런 면에서는 굉장히 단순하다. 얼른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려버리거나,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해서 지난 일을 잊는다. (그래서 연애 초반에는 분명 그 안에 숨겨둔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단순한 거였다.)


하고자 했던 일을 망쳐서 기분이 엉망이 됐을 때, 예를 들어 친구가 직전에 약속을 취소해서 금요일 밤 내내 혼자 보내게 됐거나 반대로 내 일정이 틀어져서 하고자 했던 일을 포기해야 했을 때, 원래의 나라면 남은 밤 내내 엉망이 된 기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문득, 이럴 때 애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으로는 안 된다. 빙의를 해보자!’

일단 애인처럼 의자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후 애인처럼 판단하려고 해봤다.


 ‘어, 음, 일단 제일 좋아하는 배달 음식을 시킬 것 같고, 보고 싶었던 영화나 미드를 다운받을 것 같아. 참, 맥주도!’


그래서 그렇게 했다. 우울할 새 없이 즐거웠다.



막상 해보니 내 주변 사람들에게 빙의하는 것이 기분 전환하는 데 꽤 효과가 있었다. 분기마다 옷장이 빵빵해져서 정리를 해야 하는데, 나는 도저히 옷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럴 땐 동생에게 빙의해서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이거 작년에 입었어?”
 “아니.”
 “재작년에는?”
 “안 입었는데, 내년엔 입을 거야.”
 “그럼 내년에 다시 사. 버려.”

원래의 나였으면 고스란히 안고 있을 옷들을 동생에게 빙의한 덕분에 몇 벌 버렸다.


집이 자꾸 자꾸 지저분해지려 할 때는 내 친구 S에게 빙의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깔끔하게 집을 유지하 는 사람이다. 그 집에 놀러 갔다가 “나는 그냥 하루 종일 청소만 했음 좋겠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을 정도다. 청소력 제로인 나지만, S에게 빙의하면 어찌어찌 청소를 해낸다. “S였다면 이 꼴을 절대 두고 보지 못했을 거야, 암.” 그렇게 혼잣말을 해가면서.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게 되는 날이면 또 다른 친구인 J를 소환(?)한다. J는 내 주변 사람 중 자기 자신의 목소 리를 가장 잘 들어주려 노력하는 아이다. 나조차 미워하는 나의 단점을 고백할 때마다, J는 항상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그것도 너야”라고 말해줘서 나를 울렸다. J의 따뜻한 목소리에 빙의되어 일기를 쓰다보면 꼭 울게 된다.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그럴듯한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거나, 대단한 과제를 해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가끔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정확하다. 물론, 다들 내가 그들에게 빙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겠지. 항상 몰래 소환해서 미안....


‘원래의 나’였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을, 나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해낸다. 그런 날들이 늘어가면서 조금씩 그들과 비슷해져가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그들의 반짝거리는 면면을 발견해가면서, 이렇게 닮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illust by 코피루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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