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유목민의 사고는 실용적이다. 초원에서 예의란 거추장스럽다. 그들과 달리 한 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정주민들에게 예의는 목숨보다 중하다.
오죽하면 시경(詩經)에 “사람이면서 예의가 없는 자는 죽지도 않고 무엇 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정주민에겐 유목민들이 그런 존재였다. 여름 내 잠잠하다가도 가을 추수철만 되면 죽지도 않고 찾아 왔다.
중국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강대국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삭빠르고 실용적이어야 했다. 그 가운데 조(趙)나라는 늘 유목민들에게 시달렸다. 굳이 손자병법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적을 이기려면 먼저 그들을 알아야 한다. 조나라 무령왕은 그들의 장점을 연구했다.
어째서 싸우기만 하면 저들이 이기나.
깊이 캐물어 본 결과 그들의 장점이 말과 활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주민족 끼리의 당시 전쟁은 전차 싸움에서 승패가 갈렸다. 말이 모는 전차였다. 기수와 궁수 둘 등 세 명이 탔다. 무장이 너무 무거운 탓에 혼자 말을 모는 유목민에 비해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들을 이기려면 그들의 장점을 본받아야 한다. 무령왕은 헐렁한 조나라 군복을 짧은 소매에 허리를 졸라맨 오랑캐 복장으로 바꾸었다. 간편한 차림을 하자 군사들이 활쏘기에 편해졌다.
조나라의 전투력이 단번에 높아졌다. 역사가들은 이를 호복기사(胡服騎射)라 부른다. 오랑캐 복장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쏜다는 뜻이다. 언뜻 별것 아닌 조치 같지만 당시 조나라 안에선 파격이었다.
역시 문제가 생겼다. 조정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비록 복장일망정 점잖은 선비가 어찌 오랑캐의 것을 따른단 말인가. 오랑캐의 옷(胡服)은 중원의 예법에 어긋났다. 이는 고대 중국에선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유학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예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은 엄격했다. 공자가 천하를 떠돌 무렵 일이다. 나이 70에 이르러 고향 근처에 당도했다. 저 멀리 샘이 보였다. 모두 목이 말랐지만 공자는 애써 샘을 지나쳤다. 샘의 이름이 하필 ‘도천(盜泉․도둑 샘)’이었기 때문이다. 훔칠 도(盜)자가 턱하니 목에 걸렸다.
밤이 되어 어느 마을에 당도했다. 공자는 애써 그 마을을 비켜갔다. 마을의 이름이 ‘승모(勝母)’여서다. 감히 부모(父母)를 이긴(勝)다니. 그런 곳에선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도천이라 물을 마시지 않고, 승모 마을에선 잠도 자지 않는 게 당연시됐다. 하물며 호복(胡服)이라니.
무령왕은 신하들을 설득했다. 오랑캐 복장이면 어떠냐. 전쟁에서 이기면 그만이지 않나.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그깟 따져 무엇 하나. 쥐만 잘 잡으면 되지. 결국 간편한 군복으로 바꾼 조나라는 진(秦)과 맞먹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처음으로 중원을 통일했던 진시황 역시 실용적 인물이었다. 진시황은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는 완력만으로 천하를 얻진 않았다. 실제의 진시황은 실익 앞에선 완고한 허리를 굽힐 줄 알았다.
진이 초나라 정벌을 앞두고서 일이다. 진시황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만큼 상대가 강했다. 진시황은 이신과 왕전 두 장군을 불렀다. 이신은 젊고 왕전은 백전노장이었다.
초나라를 치는데 얼마의 병력을 주면 되겠냐고 각각에게 물었다. 젊은 이신은 20만을 원했다. 노장 왕전은 60만을 달라고 했다. 진시황은 먼저 이신에게 20만 대군을 내주었다.
왕전은 병을 이유로 낙향했다. 자신만만하던 이신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진시황은 얼른 시골로 내려간 왕전을 찾아갔다.
진시황의 다음 행동은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왕전을 만난 진시황은 신하에게 머리를 숙였다. 설마, 저 무서운 황제가 나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실이란 말인가. 왕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내 앞에서 머리를… 왕전은 곧 전쟁에 나가 초나라를 진시황에게 바쳤다.
그런 진시황을 사가들은 폭군에 초점을 맞춰 기술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진을 이은 한나라 사관들이 그를 공평하게 적어줄 리 없었다. 오로지 역사가 사마천만은 이렇게 남겼다.
배운 자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에 얽매여 진나라가 오래 존속하지 못한 현상만 본다.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 못한 채 모두들 비웃으며 감히 칭찬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귀로 음식을 먹으려 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슬픈 일이다. -사마천 ‘사기’
테무친 실용적 인물이었다. 그는 노획보다 배분에 더 정성을 기울였다. 전투에서 지는 것은 늘 있을 수 있다. 다음 전투에서 이기면 된다. 전리품 배분을 잘 못하면 아예 다음 전투에 나설 전의를 잃게 된다. 테무친이 가장 두려워한 상황이었다.
20대 중반에 이른 테무친은 스스로를 칸(Khan)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는 단순히 한 부족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칸은 ‘왕(王)’이라는 의미다. 일종의 정치 선언인 셈이다. 젊은 테무친의 대권 도전이었다.
테무친은 사전에 이를 왕칸에게 통보했다. 그가 반대하면 칸이라는 칭호를 포기해야 했다. 아직 그의 비위를 거스를 단계는 아니었다. 왕칸은 승낙을 했다. 수하가 왕이면 자신은 황제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부족이 커진 만큼 새로운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테무친은 조직의 개혁을 단행했다. 혈연관계는 최대한 배제했다. 능력과 충성심을 우선했다. 몽골 고원에선 보기 드문 파격이었다. 피가 물보다 진한 원리는 어디서나 통용된다. 테무친은 이 원칙에 따르지 않았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에겐 주방과 식량을 맡겼다. 아버지의 독살로 인해 이 두 가지는 테무친에게 가장 사무치는 일이 됐다.
테무친의 칸 선언을 안다 자무카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안다(친구 또는 의형제)이지만 한 때 자신의 아래에 있던 테무친이다. 안다의 칸 선언은 그를 자극했다. 자무카는 신하들에게 자신을 구르칸(사해의 왕이라는 뜻)으로 부르게 했다.
자무카의 구르칸 선언은 주변 강대국들을 자극시켰다. 특히 왕칸이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왕칸은 구르칸이라는 단어 자체를 싫어했다. 왕칸은 한 때 구르칸으로 불린 숙부를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했다. 당시 테무친의 아버지는 왕칸을 도왔다.
자무카는 나이만, 타이치우드, 메리키트 등 주변 국가들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왕칸이나 테무친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들이었다. 결국 동맹군과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