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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17.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11


자무카의 최후     

 

몽골 초원의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테무친이 사라지자 왕칸-자무카 동맹은 깨졌다. 원래부터 서로를 불신해온 사이였다. 자무카를 비롯한 몇몇 칸들이 왕칸의 권위에 도전했다. 

자무카는 왕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사전에 들통 나는 바람에 멀리 달아나야 했다. 그해 가을 초원을 흔드는 대형 뉴스가 전해졌다. 팽팽한 세력 균형을 무너뜨릴 소식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테무친이 살아서 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칸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 테무친은 끝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테무친은 곳곳으로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반대편에 섰던 일부 칸들이 잽싸게 테무친에게 투항했다. 

신기하게도 테무친의 부대는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그 수가 점점 불어났다. 700년 후 마오쩌뚱의 홍군(紅軍)은 장정(長征)을 통해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 테무친의 군대는 마치 주변의 습기를 빨아들이는 태풍의 눈처럼 부풀어 올랐다. 

겨울이 되자 고비 사막의 세력 균형은 왕칸과 테무친으로 양분되었다. 양 진영을 중심으로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신흥강국 아테네의 부상에 따른 스파르타의 불안감으로 인해 양국이 전쟁을 벌이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수컷이 나타나면 기존 챔피언과의 결투가 불가피해진다.


테무친은 왕칸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소뿔에 담은 피’를 그에게 보냈다. 이는 유목민들이 행하는 우정의 상징이었다. 일종의 유화책이었지만 그 속에는 무서운 계략이 숨어있었다. 그는 이미 과거의 테무친이 아니었다.

왕칸의 방식을 차용해 그를 상대하려 들었다. 자식들의 혼인 축하연을 열자고 제안해놓고 테무친을 죽이려했던 왕칸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방식이라도 상관없었다. 

왕칸은 섣불리 테무친에게 신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소뿔에 담긴 피를 본 후 마음의 경계심을 약간 풀었다. 치명적 실수였다. 상대를 안심시킨 테무친은 눈 녹기 전 왕칸을 치기로 했다. 겨울인데다 호의까지 전달 받았으니 상대는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기습전의 성패는 속도와 비밀 유지에 달렸다. 테무친은 굳이 험한 고개를 넘는 행군 노선을 선택했다. 험악한 만큼 그곳의 경계는 허술했다. 말을 바꾸어 타며 전속으로 내달려 왕칸의 진지를 급습했다. 

허를 찔린 왕칸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몽골비사>는 테무친의 ‘완벽한 승리’라고 기술해 두었다. 왕칸은 서쪽의 나이만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국경에서 어처니 없는 일을 겪게 된다.

국경 수비대 장수는 전설의 ‘프레스터 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수상한 늙은이 한 명을 발견하고 살해했을 뿐이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의 아들은 도망자로 전락하여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결국 위구르인들에게 피살됐다. 


대 케레이트 제국이 테무친의 수중에 떨어졌다. 테무친은 제국의 소르칵타니 공주와 막내아들 톨루이를 혼인시켰다. 그들 사이에서 쿠빌라이가 태어났다. ‘세계의 정복자’ 대를 이을 ‘세계의 경영자’의 탄생이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할아버지가 금나라를 정복한 1215년에 태어났다. 손자의 얼굴을 처음 본 칭기즈칸은 “이놈 봐라. 꼭 중국인처럼 생겼네”라고 웃었다고 한다. 이제 몽골 고원에 남은 적은 나이만뿐이었다. 그곳에는 자무카가 도망자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1204년 봄 쿠릴타이(몽골의 최대 의사 결정 회의)가 소집됐다. 나이만과의 전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장군들은 봄에는 말이 야위어 있으니 가을까지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몽골 고원의 겨울은 말에게도 혹독한 계절이다. 

동생인 테무게와 노얀은 전쟁개시를 주장했다. 테무친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첫 전투는 카라코룸(몽골 고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옛 몽골의 수도) 근처에서 벌어졌다. 

테무친은 세계전쟁사에 남은 기발한 작전을 선보였다. 병력을 여러 겹으로 길게 늘어선 채 적을 맞았다. 앞줄이 화살을 쏘고 뒤로 빠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왔다. 이를 본 나이만 군도 병력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러자 테무친은 재빨리 병력 배치를 바꿨다. 앞을 뾰족하게 한 고깔모양으로 전환시켰다. 나이만 군 대형의 약점을 찾아 송곳처럼 찔러 들어갔다. 훗날 나폴레옹도 이런 전술을 즐겨 썼다. 병력을 한 군데 집중시켜 적의 약한 곳을 찾아 먼저 부수었다. 

유럽 여러 나라와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안겨준 ‘속도전’도 몽골군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행군 속도는 늘 예상을 뛰어 넘었다. 나폴레옹이 병참 부대를 최소화한 것도 몽골 방식이었다. 

나이만 왕은 전사했다. 자무카는 또 달아났다.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자무카는 산적으로 전락했다. 얼마 후 그의 부하들은 자무카를 산채로 묶어 테무친에게 데려왔다. 테무친은 자무카를 배신한 부하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테무친은 자무카에게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자무카는 “세상이 이미 그대 것인데 나는 짐만 될 뿐이다”며 거절했다. 몽골의 왕자답게 피 흘리지 않은 채 최후를 맞게 해주었다. 테무친은 안다의 증표로 주고받은 허리띠를 채워 그를 장사지냈다. 

이제 알타이 산맥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 모두 테무친의 것이 됐다. 테무친은 1206년 봄 성산(聖山) 부르칸 칼둔 근처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아내를 빼앗긴 곳도, 적들을 피해 달아났던 곳도 모두 부르칸 칼둔 산이었다. 

몽골과 투르크 계 유목민 대표가 모두 모였다. 그는 칭기즈칸(Chinggiz Khan)으로 추대됐다. ‘칸 중의 칸’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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