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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25.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17

 왕좌의 게임    

 

몽골군은 1241년 4월 독일 연합군과 헝가리 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이제 다뉴브 강만 건너면 곧바로 서유럽이었다. 빈의 숨결이 가까이 느껴졌다. 유럽은 4세기 훈족의 침입 이래 900년 만에 다시 극한의 공포를 경험했다. 서유럽은 동쪽에서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유럽은 폭풍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온 유럽의 교회가 기도 소리로 넘쳐났다.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쓴 헤럴드 램은 “위기의 유럽을 구한 것은 동쪽에서 온 한 통의 편지였다. 종이 위에는 대칸 우구데이의 사망소식이 쓰여있었다”고  소개했다. 

몽골 고원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새 칸 선출을 위한 선거가 공고됐다. 톨루이와 차가다이는 이미 죽고 없었다.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손자들의 차례였다. 두 명의 선두주자 바투와 뭉케는 본토와 멀리 떨어진 유럽 원정에 나가 있었다. 


큰 인물의 탄생에는 반드시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구데이의 장남 구육은 마침 본토에 있었다. 하지만 구육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그는 우구데이 칸의 여섯 번째 부인의 아들이었다. 정통성에서 다른 후보들에게 한참 뒤졌다. 그런데 그에게는 천시와 지리의 도움이 있었다.  

마침 구육의 어머니 투르게네가 섭정을 맡았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투르게네는 아들을 위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투르게네는 섭정이라는 지위를 최대한 이용했다. 

반대파는 숙청하고, 지지자에겐 후한 상을 내렸다. 그런 노력 끝에 마침내 어머니는 소원을 이루었다. 1246년 7월 자신의 아들 구육이 대칸에 즉위했다. 

하지만 구육 칸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우선 동유럽의 실력자 바투와 사이가 나빴다. 바투는 유럽 원정에서 서로 의기투합한 뭉케를 지지했다. 더구나 바투의 어머니와 뭉케의 어머니는 친 자매간이었다. 몽골은 특히 모계의 혈통을 중시했다. 

바투를 편치 않게 여겨온 구육은 느닷없이 서방원정을 발표했다. 몽골 조정은 술렁거렸다. 장거리 원정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와 예상 노획물이 있어야만 했다. 서방원정에선 그런 결과들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바투는 본토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구육의 서방 원정이 자신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보았다. 구육 조정의 정확한 정보가 이모에 의해 속속 바투에게 전해졌다. 이모란 곧 뭉케의 어머니를 말한다. 

바투는 자신의 군대를 동진(東進)시켰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싸울 작정이었다. 바야흐로 몽골군끼리 전투가 벌어질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다행히 실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구육이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구육의 왕비에게 섭정 기회가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는 야망만 컸지 시어머니 같은 정치력을 갖지 못했다. 대신 뭉케의 어머니가 막후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녀는 친정(케레이트)에서 왕실의 권력 다툼을 보고 자랐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 있는 조카 바투 칸의 힘을 최대한 활용했다. 바투에게는 몽골 본토와 맞먹는 군사력이 있었다. 군사력은 곧 발언권을 의미했다. 바투는 텐산산맥 부근(오늘 날 카자흐스탄)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정치적 감각이 떨어진 구육의 왕비는 때를 놓쳤다. 칭기즈칸의 노신(老臣)들이 앞 다투어 바투 주최 쿠릴타이에 참석했다. 노회한 그들은 권력의 향방에 민감했다. 쿠릴타이에서 뭉케가 대칸으로 선출됐다. 바투와 뭉케는 칭기즈칸의 고향에서 다시 한 번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정통성 확보를 위한 과시였지만 효과는 꽤 괜찮았다. 

구육의 왕비와 그 아들들은 뭉케에 의해 철저하게 숙청당했다. 뭉케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보였다. 할아버지 칭기즈칸을 빼닮은 손자였다. 그는 동서양의 학문에 두루 능통했고 수개국어를 구사했다. 그리고 세계정복이라는 야망을 품은 대칸이었다.      

역사가들은 1259년을 주목한다.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 해였다. 오늘 날 흔히 말하는 ‘세계화’의 첫 걸음이 시작된 해다. 몽골 제국의 새 칸으로 선출된 뭉케는 남송과 중동 원정에 착수했다. 

뭉케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했다. 뭉케의 ‘세계정복’ 야심은 착착 진행되었다. 그에겐 야심을 충족시킬만한 군사력과 지도력이 있었다. 지구의 동과 서를 하나의 띠로 연결하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 칸은 셋째 동생 훌라구에게는 중동을 일임했다. 훌라구는 아버지 톨루이를 닮은 전사였다. 남송 정벌에는 자신이 직접 나섰다. 초기에는 쿠빌라이를 남송 원정서 배제했다.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는 쿠빌라이의 배제 이유는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중국화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송 정벌 후반에 이르러 쿠빌라이를 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쿠빌라이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전까지 쿠빌라이의 행적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깜짝 등장이었다.

남송과 중동은 몽골의 세계 정복 퍼즐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두 개의 빈 칸이었다. 유럽이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무시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지역이었다. 남송정복은 조부 칭기즈칸의 유언이기도 했다. 


원래 쿠빌라이에게 주어진 영지는 북중국이었다. 황하를 끼고 있는 이곳은 중국 문명의 발상지다. 쿠빌라이는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선 몽골의 초원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다. 그는 중국 방식을 배워서 중국을 통치하려 했다. 몽골의 핵심 세력들은 이런 쿠빌라이를 몽골 방식에 대한 이단으로 간주했다. 

어느 문화권이건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온 세계가 몽골의 손 안에 든 시기였다. 유목 방식에 대한 몽골 지도부의 자부심은 단단했다. 

쿠빌라이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약탈 대신 경영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약탈은 일회용으로 그치지만 경영은 영구적인 재화의 공급을 보장했다. 나중에 영국이 식민지에 적용한 방식이다. 그러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쿠빌라이의 방식은 근대화된 모델이었다. 한꺼번에 몽땅 수탈해 버리면 미래의 먹거리가 사라진다. 식민지 농민에게 식량을 조금 나눠줘야 영구 수탈이 가능하다. 거위의 배를 가르면 더 이상 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쿠빌라이는 중국 농민들의 세율을 오히려 낮추어 주었다. 생산성이 높아져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둔전을 설치하여 군인들이 영내에서 자급자족하게 만들었다. 성(城)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성안에서 살아가도록 보호해 주었다. 

몽골 본토의 보수적 세력은 쿠빌라이의 방식에 불만을 가졌다. 그들의 속삭임은 두 형제 뭉케와 쿠빌라이의 사이를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뭉케는 쿠빌라이 영지에 대한 대규모 세무조사를 명했다. 속속 위반 사항이 드러났다. 탈탈 터는데 먼지가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쿠빌라이의 수족들은 뭉텅뭉텅 잘려나갔다. 주요 참모들이 관리직에서 쫓겨났다. 극형에 처해진 관료도 있었다. 쿠빌라이의 권한은 축소됐다. 성급한 쿠빌라이 참모들은 본토와의 전쟁을 입에 담았다. 쿠빌라이 역시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참모 요추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적극적으로 주군을 만류했다.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가진 자였다. 전쟁은 곧 반란을 의미한다.  

현재의 군사력으론 필패지세다. 이기기도 힘들겠지만 이겨도 불안정하다. 러시아 초원의 바투는 물론 중동의 훌레구,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등 주변 세력들이 반란이라는 참전 명분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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