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가제(神風)
북쪽 일은 해결됐으나 이번엔 남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이 무렵 남송의 황제가 바뀌었다. 도종(度宗)이 죽고 공제(恭帝)가 즉위했다.
황제의 나이 고작 네 살이었다. 실권은 재상 가사도가 틀어쥐었다. 모든 조정이 가사도의 뜻대로 움직였다. 궁궐의 실력자에게 어리고 나약한 왕만큼 바람직한 조건은 없다.
남송 조정은 뿌리 채 흔들리고 있었다. 정글에서 약한 상대는 먹잇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힘을 잃은 남송은 몽골에겐 좋은 사냥감이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의 대업을 수행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조부 칭기즈칸이 마지막으로 남긴 숙제. 더 이상 물의 방해와 높은 성벽, 끈적거리는 날씨와 작은 곤충(모기) 탓만 할 순 없었다. 더구나 쿠빌라이에겐 양자강을 한 번 건너본 소중한 경험이 있었다.
남송의 부(富)는 진작부터 유목민들을 유혹해왔다.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을 위해 다국적 군단을 꾸렸다. 사령관 가운데 유정과 사천택은 중국인, 아릭 카야는 위구르인, 아주는 몽골족이었다. 포병사령관 이스마일은 멀리 중동에서 왔다. 21세기 초 이라크 전쟁에 가서야 이 정도 다국적 군단을 볼 수 있다. 쿠빌라이의 몽골군은 신 개념 군대였다.
남송도 전쟁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사도는 수군제독 여문환을 양양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어리석은 자의 훌륭한 선택이었다. 여문환은 모든 면에서 불리한 전투를 5년이나 버텨냈다.
몽골군을 상대로 이토록 오래 전쟁을 벌인 군대는 고려와 여문환 군뿐이었다. 쿠빌라이는 나중에 그를 수군 제독으로 중용했다. 적이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장수였다.
양양은 남송의 수도 항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끼고 남으로는 현산(峴山)을 둘렀다. 삼국지연의는 이곳 일대를 차지하기 위한 위, 오, 촉이 치열한 다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촉의 명장 관우가 전사한 곳도 이 지역이었다.
가사도는 어린 황제에게 늘 승전 소식만 전해주었다. 물론 허위 보고였다. 눈과 귀를 가린 황제는 안심했다. 게 중에는 남송군의 실제 승전도 없진 않았다.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여러 차례 양양 성안으로 보급품이 전달됐다. 이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몽골 수군의 전투력이 갈수록 향상됐다.
양양의 오랜 교착상태를 깨트린 것은 중동에서 건너 온 신무기였다. 회회포(回回砲)라고 불린 투석기는 90㎏ 무게의 돌을 수백m나 날려 보냈다. 거대한 돌은 공포로 변해 성안으로 떨어졌다. 양양의 쌍둥이 도시인 번성이 먼저 함락됐다.
전쟁에는 막대한 전비가 소요된다. 가사도가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올리자 민심은 그를 외면했다. 여문환의 양양도 얼마 후 항복했다. 여문환은 오랫동안 가사도에게 시달려왔다. 여문환은 외적에겐 높이 평가되었지만 정작 내부에선 시기의 대상이 됐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조정에서 겪은 일이었다. 이순신의 공이 높아질수록 선조를 그를 두려워했다.
몽골군은 양주에서 가사도의 본진을 꺾었다. 이 일로 가사도는 실각했다. 그가 패전한 후 항주로 돌아오자 평소 그를 지지하던 자들까지 일제히 탄핵 상소를 올렸다. 권력에 예민한 자들의 특징은 주저 없이 말을 갈아타는 데 있다. 가사도는 유배지로 가던 중 살해됐다. 남송의 마지막 황제는 몽진 길에 바다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보물 창고’ 남송이 쿠빌라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양자강 이남의 남중국이 외적에게 정복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회색 늑대와 암사슴의 자손’들은 이로써 세계 정복을 완수했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더욱 어려운 과제가 쿠빌라이에게 남아있었다. 제국의 경영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과제였다.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할 순 있어도 다스리긴 불가능했다.
몽골은 고려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애초 고려는 몽골과 직접 접촉이 없었다. 하지만 몽골과 금, 거란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변을 겪었다. 금이 몽골을 피해 황하 남부로 밀려나자 만주지역은 힘의 공백상태로 변했다.
거란족은 그 틈을 이용해 여진과 연합하여 요를 재건했다. 몽골이 이를 그냥 둘 리 없었다. 몽골에 쫓긴 거란은 고려의 영토로 넘어왔다. 고려와 거란은 평안도 강동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고려 땅까지 거란을 추격해 온 몽골은 고려와 힘을 합쳐 거란을 물리쳤다. 이를 도움으로 포장한 몽골은 고려 조정에 과도한 대가를 요구했다. 결국 고려와 몽골 두 나라 사이가 벌어졌다.
몽골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경지대에서 피살되자 양측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후 두 나라는 무려 9차례에 걸쳐 40여 년 동안 여·몽전쟁(1231~1273)을 벌였다. 몽골을 상대로 이처럼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래 동안 전쟁을 벌인 나라는 고려가 유일했다. 삼별초는 제주도까지 건너가 몽골과 싸웠다.
‘신라의 경이’라고 불린 문화재도 피해를 입었다. 현존하는 최대의 목탑인 중국의 응현목탑(67m)보다 13ⅿ나 더 높은 황룡사 9층탑이 이 때 소실됐다. 80m의 목조 건물은 오늘 날의 기술로도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이 탑은 공사기간만 92년 걸렸다. 1400년 전 기술로 80ⅿ 높이의 목탑을 만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쿠빌라이는 ‘왕좌의 게임’을 벌이던 도중 노상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고려의 태자 왕전(王倎)이었다. 왕전은 뭉케 칸을 만나러 가던 중이었다. 뭉케는 이미 죽고 난 후였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과거 수와 당의 군대를 물리친 나라다. 고려의 왕자가 내게로 온 것은 행운이다”며 왕전을 후히 대접했다.
왕전은 그곳에서 부왕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사정은 왕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정의 중심세력은 왕전을 부담스러워했다. 더구나 태자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두었다. 빈자리는 새로운 권력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귀국 길의 왕전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안전마저 위협받았다. 권력이란 발 달린 짐승 같아서 잠시 눈을 떼면 멀리 달아난다.
권력(power)은 그리스어 가능성(posse)에서 파생됐다. 가능성은 그 자체로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권력(權力)의 속성은 복잡하고, 심한 변동성을 지녔다. 한자 권(權)은 원래 저울추를 의미한다. 무겁고 가벼움(輕重·경중)을 가름하는 힘이 곧 권력(權力)이다.
무게를 달아 작물의 가격을 매기는 행위가 권력이었다. 농작물을 분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저울추의 중심은 오락가락했다. 권력은 또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변동성은 권력의 속성이다. 수도 개성을 멀리 떠나온 왕전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쿠빌라이였다.
쿠빌라이는 왕전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군대를 딸려 보냈다. 결국 왕전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고려 25대 왕 원종(재위 1260~1274)이다. 쿠빌라이는 그의 딸을 원종에게 시집보냈다. 혼인으로 고려 왕실의 조정권을 확보한 셈이다.
쿠빌라이의 딸은 고려에서 제국대장 공주로 불렸다. 원종과 그녀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충렬왕이다. 이후 6명의 고려 임금이 충(忠)자 돌림을 물려받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강한 나라들을 몽골의 피해자로 만들었다. 몽골의 강펀치를 교묘히 피해간 곳은 유럽과 일본이었다. 당시로는 가장 뒤쳐진 지역이었다.
공교롭게도 유럽과 일본은 나중에 몽골이 씨를 뿌린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로 드러났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반면 이때까지 번성을 누렸던 이슬람 지역은 KO 주먹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쿠빌라이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쇼군(將軍) 호조 도키무네는 몽골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당장 일본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한창 남송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바다 건너편에 있었다. 무엇보다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나라였다. 다만 세계정복이라는 원대한 꿈의 한 조각이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도 몽골은 900척의 배로 전단을 꾸렸다. 고려가 몽골의 일본 원정을 도왔다. 고려·몽골 연합군은 큐슈의 하카다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지상전서 완패를 당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대포의 위력에 혼비백산했다. 그로부터 약 600년 후 일본은 미국 흑선의 신형 대포에 놀라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침략에 사용했다.
몽골군은 그날 밤 바다 위의 배로 돌아갔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결국 태풍이 몰아쳐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쿠빌라이는 1281년 일본정복을 위해 3,500척의 배를 동원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함대였다.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기껏 130척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함 수는 210척. 세계최강 해군력을 갖춘 미군은 2021년 현재 6개 함대(2~6함대, 1함대는 없음)에 3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
항공모함 수는 11대(2017년 건조된 제럴드 포드 함을 포함한 숫자)다. 13세기와 현재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배의 크기와 용도도 다르다. 그럼에도 3,500척은 놀라운 숫자다.
몽골군은 남송을 정복한 후 해군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이번에도 태풍을 만났다. 일본인들은 신(神)이 바람을 일으켜 자신들을 구했다고 믿고 있다. 이른바 가미가제(神風)다.
쿠빌라이는 3차 원정을 계획했다. 이번엔 총력전을 구상했다. 그런데 나얀의 반란으로 무산됐다. 두 번은 바람이, 한 번은 반란이 일본을 구했다. 13세기 일본은 작은 국가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일본은 뜻밖의 반사 이익을 얻었다. 비로소 국가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인식하게 됐다. 스기야마 마사아키교수는 “일본에 신국(神國) 사상이 대두된 것은 이 무렵부터다”고 주장한다. 몽골의 침입이후 유럽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