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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예은 Apr 05. 2024

<랩 걸>, 우리가 된다는 것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흙을 파고 이파리를 들여다보는 과학자가 있다. 그는 ‘호기심에 이끌려서 하는 연구’의 기금을 따내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무엇이 가장 걱정이냐는 질문에 “돈이오.”라고 대답한다.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 박사는 우리를 자신의 실험실로 초대한다. 마이너리티의 실험실에 우아하고 고상한 백인 남성 과학자는 없다. 대신 괴팍하고 끈질긴 실험실 좀비들이 있다. 여성, 이민 4세대, 돈이 되지 않는 식물 연구자, 다중적 비주류 정체성을 가진 자런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부으며 과학을 하는지 말한다.


화학과 영문학을 공부했던 엄마와 물리학 교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런은 유년 시절 ‘여자 아이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 자런은 자신이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의 실험실로 대피했다. 실험실에서는 자유롭고, 자신다운 행동이 허용됐기 때문이다. 아빠와 같아지고 엄마가 누렸어야 했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자런은 대학에 진학해 과학을 선택한다. ‘여자아이답지’ 않다고 받아들여졌던 자런의 집요함과 끈질김은 과학에 필요한 특성이자 잠재력이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과학 교수에게 받아들여진 그는 같은 이유로 과학계로부터 외면당한다. 집요함과 끈질김은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는 동력인 동시에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자런이 원하는 식물 연구는 자본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식물 연구는 돈을 벌어다 주지 않기 때문에 자런은 동료에게 고용 안정성은 물론 최저 생활 임금조차 보장하지 못한다. 그는 전쟁과 우주 개발을 위한 과학만을 지지하는 미국 정부와 과학의 상업화를 지적하며 환경 과학의 필요성을 제고한다.


자런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자본화된 과학만이 아니다. 과학계에는 자런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를 동료 과학자로 인정하지 않고 소외시키는 공고한 성차별이 있다. 자런의 집이자 그가 그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실험실에서조차 강력한 젠더 지리학이 작동한다. 자런은 임신과 안전을 이유로 자신의 실험실 출입을 외부인으로부터 통제당한다. 실험실에 상주하는 임신한 여성 과학자는 ‘그들’에게 생경한 존재이고, 진정한 외부인이다. 공간 침입자는 종신 교수직을 포기하고 다시 처음부터 새 실험실을 시작한다.


자런은 뿌리를 내린다. 그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았고, 세상을 식물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성공한다. 자신의 이파리를 발견하고, 나무가 되기 위한 긴 여행을 단단히 준비하고 즐긴다. 자런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속한 동시에,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동료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런에게는 빌이 있다. 이들의 유사성과 차이점은 둘의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노르웨이인의 피를 물려받은 미국인 여성과 아르메니아인의 피를 물려받은 미국인 장애 남성의 조합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이들은 연구 자금을 확보하고, 과학적 지식을 발견하며, 새로운 기계를 만든다.


자런은 빌과 그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약함을 보완하고, 상처를 우리만의 방법으로 보듬으며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영양분을 공급하고, 위험 신호를 보내고, 무수한 적들의 공격을 함께 견뎌내는 동료 나무가 있다면 몽상에 가까운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 과정에 오물을 뒤집어쓰며 여러 번의 교통사고를 겪고, 냉동식품과 영양 음료로 연명하며 건강을 해치는 일이 수반될지라도 말이다. 같이 있을 때 가장 자신답게 행동할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나 “온 세상에 또 한 방 먹였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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