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게 나한테 얼마나 많았는지, 얼마나 소중했는지 명확하게 인지한다.
거창한 첫 문장이지만 겨우 피지 낭종 제거 수술을 한 이야기다.
나한테 큰일이긴 했다. 몸에 칼 및 뾰족한 것을 대는 것, 사고로 인해 다친 게 아니고선 내가 자발적으로 내 몸에 뭔가 흠집 내는 것을 싫어했다. 정말이지 아픈 게 너무 싫다. 그래서 귀도 못 뚫었다.
세상엔 수많은 복잡한 수술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인지 무엇인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수술할 일이 내 평생엔 별로 있지 않았다.
볼에 생긴 피지낭종. 크기가 커서 수술을 해야 했다. 내 평생에 수술실 첫 방문. 수술을 안내하는 간호사 선생님은 "부위가 생각보다 커서 흉이 질 거예요. 그리고 이거 수술하고 저작운동이나 말을 많이 하면 안 돼요."
순간 덜컹했다. "말을 많이 하면 안 돼요? 그럼 웃는 건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건 어느 정도를 말씀하세요?"라고 바로 물었다.
선생님은 약간 미소를 지으며 "일상적인 대화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여하튼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피지 낭종을 꺼내면 그곳에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무리하면 그곳에 피가 고여서 재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라고 안내해 주셨다.
간단한 서명 후 수술실로 가는 길.
"선생님, 저 수술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너무 떨려요."
수술실로 안내하는 간호사 선생님께 조잘조잘 지금 느끼는 감정을 말했다.
선생님은 귀엽다는 듯이 '풋'하며 "괜찮을 거예요. 30분밖에 안 걸려요. 잘될 거예요!"라고 해주셨다.
수술실에 다른 간호사 선생님께 인계 되고 수술 옷을 입고 수술실로 입장! 대학병원이라 그런지 각종 과의 수술실이 쭉 이어져있었다. 수술방의 작은 창을 통해 언뜻 보이는 내부에는 복잡한 의료기기들이 가득했다.
부분마취만 하면 됐고, 볼에 수술을 하기 때문에 맨 정신으로 걸어서 수술실로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구경이었다. 흔히 할 수 없는 진귀한 광경.
수술실에 들어서자 교수님이 "어서 와요~"라고 인사하며 바로 "오늘 생각보다 커서 흉 질 거예요." 하신다.
처음 병원에 방문해서 진료하실 때부터 계속 흉 질 거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흉 질 거예요. 커서.", "네? 흉 안질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네 흉 져요.", "아~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죠?". "네. 이거 그냥 두면 커질 거예요. 흉 져요.". "이거 얼굴인데. 흉 져요?", "네! 흉 져요."ㅋㅋㅋㅋㅋ이런 식으로 대화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게 단호할 줄이야.
나중에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동생에게 흉 진다고 말씀하셔서 심난하다고 하니 "원래 의사 선생님들은 가장 최악을 말해. 괜찮아 언니. 나중에 재생크림 잘 바르고 레이저 치료하면 돼 돼. 걱정 마."
또, 단순한 나는 "그래?" 하면서 안심했다.
수술을 하기 위해 내 얼굴 위에 소독약을 바르고, 귀를 솜으로 막고, 수술천들을 올리고 수술을 시작하기 전. 간호사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서 뭐라고 뭐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려서 "네?"라고 하니 더 가까이 오셔서 이야기해 주셨다.
"좋아하는 가수 있으세요?"
이걸 지금 왜 물으시지?라는 내 눈빛을 읽으셨는지
"노래 틀어드리려고요."라고 하셨다. 눈물 날 뻔. 순간 하나님께 감사했다. "최유리 가수요."라고 말하고 하나님께 속으로 감사했다. '하나님, 제가 떨고 있는 거 또 아셨군요. 이런 방법으로 저를 위로하시다뇨. 감사합니다. 이 수술도, 이 의사 선생님의 손도, 간호사 선생님의 손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평안해졌다.
마취 후 몇 번에 가위질 소리가 들리더니 교수님이 간호사 선생님께 질문했다. "고려를 세운 왕 이름이 뭐지?" 간호사 선생님은 이걸 지금 왜 물으시지? 머뭇거리며 "왕건이요."라고 하니 교수님은 만족한다는 듯이 "응. 왕건이다." 하면서... 나의 피지 낭종을 보며 이야기하셨다. 어이가 없고 단호하긴 했지만, 친절한 교수님이었다. 자신이 하는 수술의 과정을 나에게 계속 설명해 주셨다. "이제 시작할게요.", "마취할 건데. 아파요. 참아야 해요.", "마취 잘 되었는지 확인할게요. 지금부터 콕콕 찌를 건데 아프면 이야기해 줘요.", "이제 떼어내기 시작할 거예요.", "피가 좀 많이 나서 지혈할게요." 등 상세히 안내히주신 덕에 안심하며 수술받을 수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교수님은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볼에서 빼낸 거 꼭 보여드려요."라고 강조하셨다.
간호사 선생님은 "이렇게 나왔어요." 하며 보여주셨다. 그걸 꼭 봐야 하냐는 생각이 들어 간호사 선생님께 "선생님 그거 꼭 제가 봐야 하는 건가요?" 하니, "아뇨. 왜 보여주나 싶으셨구나. 별로 안 보고 싶으셨구나."라고 해서 조용히 풋하고 웃었다.
그리고 나오는 길, 거즈와 솜을 잔뜩 붙인 왼쪽 볼의 부피감을 느끼며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간호사 선생님께 "교수님이 농담을 즐기시나 봐요."라고 물으니 "네... 그러세요. 힘들어요..."라고 답변하셔서 둘이 같이 빵 터졌다.
순간, 수술 전 간호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하.. 그런데 수술 마치자마자 도대체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나.
그 순간 알았다. 나의 일상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농담과 관찰한 것 말하기, 표현하기 등이 대부분이었다. 즉, 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조금 참아야 한다. 특히나 더 고역인 것은, 웃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별로 웃겨하지 않는 것도 사서 웃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말 많이 하지 말아라, 웃지 말아라'라는 지령을 받으니 내가 평소에 얼마나 말이 많고 웃음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인생에 몇 번 없는 기회일 것 같고, 몇 번 없으면 좋겠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고민이 시작됐다. 말도 많이 못 하고, 웃지도 못하는 이 시기를 뭘 하면 좋을까.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어쩔 수 없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야 한다.
이해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