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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익은 May 05. 2024

이성적인 의사결정은 가능한 것인가

이성을 절대적으로 추앙하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근대 사유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이지만, 그간 과학이 보여준 엄청난 성과 때문인지 우리들은 여전히 ‘이성’이라는 위상에 압도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성적인 사고는 잘못된 의사결정을 피하고, 이견에 대한 의견 합치를 끌어낼 수 있으며, 구성원의 불만을 잠재우고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공적인 상황이든 사적인 상황이든 모두가 지향하는 사고방식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어떠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혹은 남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이성적인가를 열심히 설명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 있으면서도, 나는 매스컴을 통해 다양한 자료를 보고 사건·사고를 접하며 과연 인류(人類)가 무의식이나 감정을 배제한 온전히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한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기조라고 여기지만, 물리학처럼 공식화 또는 정량화할 수 없는 인간의 활동이나 인간이란 개체를 세분화하는 여러 항목을 정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며,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 이렇게 불완전한 사고들을 근거로 하여 내린 잘못된 ‘이성적인’ 결정으로 빚어진 참극(홀로코스트, 대약진 운동 등)들을 살펴보면 맹목적인 이성에 대한 추앙을 다시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는 무거운 주제보다 우리가 사회나 일상생활에서 내리는 수많은 의사결정 중에 비이성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많이 스며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먼저, 인간관계에서의 의사결정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조금이라도 자리 잡게 되면, 상대방이 하는 말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 연인 간의 의심이 여기에 속한다. 만약 과거에 연인의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 의심의 싹이 피어나기 시작했다면, 전날 밤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았던 연인에게 해명을 요구하여 “미안해, 어제 너무 피곤해서 연락을 받지 못했네.”라는 이유(사실)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심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거짓말까지 하는구나’라며 그 진위여부를 자신의 감정으로 판단해 버리곤 한다.

반대로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쌓이면, 상대방의 언행에서 스며 나오는 위험신호들을 객관적으로 읽어낼 수 없다. 친분을 이용한 사기들이 여기에 속한다. 생전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고 역정을 냈을 법한 요구에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또 심지어는 그 의심 가는 말들과 행동까지 철석같이 믿어버린다. 그러고는 배신을 당한 후에, 그 전에 했던 말과 행동들을 천천히 복기하면서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이다.


다음은, 회사에서의 의사결정이다.

회사에서는 인원 채용, 승진 심사, 부서 이동, 임금인상 등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의사결정들이 있다. 아무리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를 나눈다고 해도, 회사의 입장에서 현 시점과 미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판단 기준들을 마련하는 것부터, 개인들의 성향과 특징들을 모두가 납득할 만한 근거들로 수치화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과학에 대한 이론이나 그 내용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접목하는 조직이 바로 회사이지만,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사회과학은 그 자체가 지닌 여러 한계점을 그대로 안고 갈 수밖에 없으므로, 회사라는 조직에서 내리는 모든 ‘이성적인 판단’에는 결국 맹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대외 활동을 하는 영업직이 아닌 이상 외모는 직무에 필요한 역량이 전혀 아님에도, 외모와 임금의 상관관계가 유의미하다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연구팀의 분석도 이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정당과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이다.

미국에서는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형성된 정치적 신념이 평생 지속될 수 있다는 이론이 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첫 선거가 개인의 정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정당일체감이라는 용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한 번 형성된 정당에 대한 지지는 마치 심리적 애착 같아서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의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특징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우리는 투표할 때마다 그리고 물건을 구입할 때마다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에 실제 행동을 위한 어떠한 동력을 수집하고 있던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된 세 가지 사례 말고도,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성적으로만 내린 판단이 아닌 것들을 이성적인 의사결정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신의 판단에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것들은 무시하는 확증편향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어떠한 감정이 자리 잡는 그 순간부터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대체 이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이성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일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때 정말 객관적인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지, 혹시 마음에 끌리는 대로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을 끌어모으고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들은 본래 온전히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적합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이는 ‘이성’이라는 위상에 기대어 자신(개인이나 집단)의 의사결정을 곧 진리라고 믿으며 압도적인 힘으로 타인에게 의견 수용을 강요하고 또 실제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깊이 생각해 볼 내용이다.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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